[인스타산책] 이이엄 - 취향이 깃든, 차향 가득한 공간

주인이 직접 만든 다구, 취향이 담긴 소장품 돋보이는 찻집 겸 전시공간
자족 의미 담은 이름 이이엄(而已?), 조선 후기 시인의 택호 이어받은 것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처럼 방문객에게 '나만의 시간' 만들어주고파

차 한 잔을 통해 '나만의 공간'을 구현하는 이이엄은 번다한 세사 시름을 잠시 내려놓고, 침묵과 사색을 통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차 한 잔을 통해 '나만의 공간'을 구현하는 이이엄은 번다한 세사 시름을 잠시 내려놓고, 침묵과 사색을 통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차(茶)는 본래 약(藥)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고대 중국의 신농 황제가 72가지 독에 중독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물 주전자에 우연히 날아온 나뭇잎을 끓여마시자 해독되었다는 기록이 역사 속 차의 첫 등장이다. 본격적 재배에 대한 기록은 사기에 남아있는 기원전 1066년이 시초다. 3000년 넘게 내려온 차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정작 우리 생활 속 다례는 다소 낯선 예법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차 문화와 다례의 접점을 공간으로 구현해낸 '이이엄(而已?)' 은 온전하고 순고한 정취로 정성을 다한 차 한 잔을 맛볼 수 있는, 근래 보기드문 찻집으로 각광받는다.


인왕산이 올려다 보이는 적요한 옥인동 골목 안, 새하얀 2층 건물 창문이 온통 천으로 가려져 있다. 다만 출입문 오른쪽 한자로 쓰인 ‘일용미 이이엄(日用美 而已?)’ 이란 문패만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공간 곳곳을 채운 다기들이 손님을 맞는다. 흔한 노랫소리 대신 물 끓는 소리가 희미하게 흐르고, 낯선 이를 맞는 주인 주명희 대표는 조심스럽게 손님을 2층으로 안내한다.

편안한 느낌의 일본식 돗자리가 펼쳐진 방에 앉아 차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이, 공간 곳곳에 그림자처럼 놓인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오신 분들이 차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드리고 싶었어요. 편하게 얘기하면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서울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자기만의 방'이란 느낌을 주는 곳은 흔치 않았거든요." 주 대표의 의도는 인간의 물적 환경이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구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예사롭지 않은 주인장의 내공에 문득 이 공간이 어떻게 출발했는지 궁금해졌다.


차 마시는 일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차와 함께 휴식의 공간을 내어주고 싶었다는 주명희 대표의 바람은 이이엄을 통해 조금씩 성취되고 있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차 마시는 일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차와 함께 휴식의 공간을 내어주고 싶었다는 주명희 대표의 바람은 이이엄을 통해 조금씩 성취되고 있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차 한 잔을 통해 선물받는 '자기만의 방'


동양학을 전공한 주 대표는 학과 답사 중 자신의 다구로 차를 내려준 친구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차 세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이후 혼자서 다도 생활을 이어가다 본격적으로 차를 공부하고자 대학원 다도학과에 진학한 이력을 갖고 있다.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이이엄이란 찻집을 낸 건 아니었어요. 그저 사람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내어주고 싶었고, 또 차 마시는 일을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시작하게 된 거죠."

이이엄은 본래 조선 후기 시인 장혼의 호이자 그의 집 이름이다. 당나라 시인 한퇴지의 시 '허물어진 집 세 칸이면 그만(破屋三間而已)'에서 따와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족'의 의미를 담았다. 그 택호가 오늘까지 이어져 이 독특한 공간의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이엄이 품은 어감, 그리고 한자의 조합이 너무 좋았어요.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면 그 뿐, 하늘이 준 자신의 천명에 따르는 삶. 저도 그럴 생각으로 이 공간을 만들었죠."


직접 제작한 다구(茶具)들은 제각각의 모양과 형태를 지녀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직접 제작한 다구(茶具)들은 제각각의 모양과 형태를 지녀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진 = 김희윤 기자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면 그 뿐


차를 나누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장혼의 집이 있었던 옥류동(현재 옥인동)을 찾은 주 대표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반드시 옥인동일 것'이란 조건을 내걸었다. 많은 매물이 그에게 소개됐지만, 옥인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그를 두고 중개인은 '괴짜손님'이라고도 했단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공간을 얻은 그는 가장 아끼고, 또 아름다운 것들로 공간을 꾸며 손님 앞에 내어놓았다. 작은 다구를 찾던 중 마음에 차는 것을 찾지 못하자 주 대표는 도예가와 함께 이이엄만의 다구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공예품을 즐기고, 아름다운 다구를 보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제작에 나섰죠. 한데 하루는 제가 가장 아끼는 다관을 손님이 깨뜨린 거예요. 저는 눈물이 날 지경인데 손님은 도리어 '깨지면 안 되는걸 손님한테 내면 어쩌냐'며 화를 내셨죠. 귀한 것을 내놓고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함께 작업한 도예가가 '도자기는 깨지는 게 숙명이고, 깨지면 다시 만들면 된다'고 해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어요." 이때 깨진 다구는 긴쓰기(깨진 도자기를 보수하는 일본의 수리 기법)를 통해 다시 살려내(?) 손님들에게 내고 있다는 대목에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내놓고 싶다는 주 대표의 의지가 느껴졌다.


한 잔의 차와 함께 주인의 취향이 가득한 공예품을 즐기고, 아름다운 다구를 사용하는 기쁨까지 느낄 수 있는 이이엄은 다소 생경하지만, 이내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차'를 통해 선사한다. 사진 = 김희윤 기자

한 잔의 차와 함께 주인의 취향이 가득한 공예품을 즐기고, 아름다운 다구를 사용하는 기쁨까지 느낄 수 있는 이이엄은 다소 생경하지만, 이내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차'를 통해 선사한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에서 누리는 ‘잠깐의 호사’


이이엄이 내놓는 차는 대만의 반발효차인 청차(靑茶)를 중심으로 중국차, 한국차, 그리고 냉차로 구성돼 있다. 보통 이곳을 찾는 손님의 90%가 차를 접한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아 주 대표에게 추천을 구할 때가 많은데, 차를 내면서 마시는 방법과 유래 등을 차근히 설명하는 모습에서 그가 처음 차 세계에 입문했던 순간이 오버랩됐다.


낮은 조명, 은은한 차향, 언뜻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에서 갖는 나를 위한 시간은 잠깐의 호사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론 내 공간, 내 시간에 무심했던 스스로의 무던함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된다. 이렇듯 이이엄은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을 차를 통해 선물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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