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지하철 책 한 권/신달자

어느 칸이라도 자유다. 어느 칸이라도 무료다. 어느 칸이라도 내 의자가 있다. 나는 어디에서 내려도 상관없다. 나는 어느 역에 타더라도 책을 읽는다. 지하철은 독서실이다. 어둠과 햇살이 뒤섞인 청춘과 노인이 뒤섞인 이 독서실은 백색 소리 속으로 빠져드는 책의 요람이다. 독서는 늘 절정에 도달한다. 안방 내 책상에서보다 더더욱 집중력이 최대치에 달한다. 나는 책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책 속에서 생을 살다가 두루두루 살다가 내가 내려야 하는 역에서 책 밖으로 나온다.

책에서 나왔는데도 나는 계단을 올라도 책 속이고 길 위에 나와 햇살을 걸어도 책 속이다. 내가 책이 되어 있는 시간을 잘 접어 핸드백 속에 넣고 강의를 위한 강단 위에 오른다.

책들이 내 앞에 주욱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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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은 좀 시무룩해 보이고 어떤 책은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어떤 책은 눈썹을 그리느라 바쁘고 어떤 책은 괜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어떤 책은 화사한 양장이고 어떤 책은 신발까지 온통 검은색이다. 대부분의 책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떤 책은 놀랍게도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어떤 책은 어제도 만났던 책이다. 어떤 책은 보고서로 가득할 것이고 어떤 책은 문제 풀이로 빽빽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책은 지나간 일들을 복기하고 있을 것이고 어떤 책은 짝사랑하는 이에게 못다 한 고백을 수십 번 수백 번 고쳐 쓰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 곰곰이 읽어보는 책들, 혼자서 가만가만 상상해보는 책들이 "내 앞에 주욱 앉아 있다." 어느 책이나 저마다 다 간절하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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