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야구―사전(蛇傳) 9/김건영

왜 난 조그만 일에만 붕괴하는가

그러나

나는 시선을 던지는 투수 봄을 던지는 투수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나를 던졌을 때 무심히 나를 쳐내는 타자 나는 사실 이기고 싶지도 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던져 버렸다 포기도 던져 버렸다 공격의 반대는 수비가 아니라 피격입니다 아무것도 던지지 않는다면 얻어맞지는 않을 테다 자포자기면 백전불태 게임은 그런 거 아닙니까 입을 벌린 사냥개의 붉은 혀처럼 해는 떠오르고 그 속에서 탐욕스러운 亥가 나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나는 신의 아침 식사처럼 일어나서 씻는다

마운드 아래는 절벽 강철의 마인드로 십 점 만점에 실점 이것은 무엇을 수치화합니까 누가 나 대신 점수를 벌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나의 空을 받아 주지 않는다 나의 수치는 이 세상이다 한 번도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이다


타자는 지옥이다

어째서 방망이를 들고 있습니까 왜 나를 노려봅니까 선생이든 후생이든 모두 나를 때리려 합니까 더 어려운 말로 나를 어지럽혀 주세요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둠이 눈꺼풀 안쪽에 붙어 있습니다 무언가 번쩍이며 돌아다닌다 위장 속의 나비가 홧홧하게 불을 켜고 날갯짓을 할 때마다 손끝은 떨린다 신은 이럴 때만 귓속에서 이죽거리지 모든 신은 그래서 귀신이라지

청춘의 포주

홈에서 출발해서 겨우 홈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뛰어야 하다니 1루, 2루, 3루, 주자는 취해서 집에 돌아온다 파울볼처럼 떠오른 달 연장전을 진행하면 시간 외 근무 수당이 나옵니까 이번 생은 모두 전생에 따른 잔업이다 지구에서 퇴근하고 싶다 나는 또 하루를 던졌다 실패는 언제나 새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경기를 일으킨 적이 없다 저 달이 떨어지면 게임은 끝나겠지 매번 달은 다시 떠오르고 신은 다정한 말투로 화대를 요구한다 득점은 없고 통점만 주면서


미녀와 외야수

장자는 숲속의 공주 던져진 공은 혼곤한 나비처럼 날아갔다

홈런

이제 나는 아무런 달리기도 하지 않을 거야

다 상관없는 일이다

미녀와 외야수처럼 멀다

그레고르 잠자는 습속의 군주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 상관없는 일이다 홈런 집이 날아간다 가족 같은 일이다

한밤중 놀이터에서 떠도는 들개가 있다, 나에게 夜狗는 그런 의미다


뼈아픈 9회

슬프다

내가 던진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삶은 던져도 돌아오겠지 싸구려 야광별처럼 천장에 달라붙어 있다 신은, 야음을 틈타 입을 벌린 스코어보드 나는 이것을 위해 청춘을 던졌습니다만 노카운트, 어째서 공을 던지면서 춤을 추면 안 됩니까 꿈속의 관객들은 모두 돌아가고 혼자서 겪는 연장전 포크를 던지고 파스타를 던지고 고함을 던지고 애인을 던지고 글-러브를 던지고 게임을 던져도 끝나지 않던 나의 이전투구 세기말 투아웃 더러운 몸통에 열기만 꼬이고


청춘 불펜

꿈은 아직도 나를 연습하는 중

연습장을 열심히 달려 봐도 아무도 나를 꺼내 주지 않는다

불 꺼진 새벽 꿈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면 끝과 시작이 서로 옷을 바꿔 입고 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말한다


폐허 플레이


라면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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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문학에 특히 시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에 얼마나 많은 텍스트들이 패러디되어 있는지 대번에 눈치챘을 것이다. 일단 그런 점에선 분명 재미있다. 그런데 동시에 슬프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시는 웃프다. 그 까닭은 저 왜곡되고 뒤틀린 문장들이 우리의 참담한 현실을 오히려 적확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지막 문장을 보라. 이 문장은 폴 발레리가 쓴 '해변의 묘지'의 일절을 살짝 바꿔 적은 것인데, 온힘을 다해 "폐허 플레이"를 외치는 시적 화자의 어깨 너머로 당장 구의역 사고가 떠오르지 않는가. 라면 함부로 먹지 마라, 누군가에게는 지상의 마지막 양식이었느니.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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