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의자/변재섭

앉아 있는 사람이 없어도 의자는 의자다


햇살이 앉아 있고 꽃잎이 앉아 있고 나비가 앉아 있다

어둠이 앉아 있고 별빛이 앉아 있고 달빛이 앉아 있다

낙엽이 앉아 있고 적막이 앉아 있어도 의자는 의자다

먼지가 켜로 앉아 있는 의자, 모처럼 한 점 남기지 않고 물걸레로 닦아 낸다손 임자가 물방울로 바뀌었을 뿐 의자는 의자다


다리 하나 부러진 의자가 헛간 처마 밑에 버려져 있다

그가 제 일을 묵묵히 해내는 동안 세월은 고운 살결 거칠게 삭히고 뼈를 삭히며 소문 없이 빠져나갔다

남편과 아들딸들, 손주들까지 받아안고 버텨 내느라 진이 다 빠져 골다공증에 걸린 여자

푸석하니 토방에 엉거주춤 걸쳐 앉은 의자 하나가 햇살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구석에 버려진 한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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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켜로 앉아 있"어도 엄마는 여자다. 물걸레 자국이 벙벙해도 엄마는 여자다. "고운 살결 거칠게 삭"았어도, "진이 다 빠져 골다공증에 걸"렸어도 엄마는 여자다. "햇살이 앉아 있고 꽃잎이 앉아 있고 나비가 앉아 있"는 여자, "어둠이 앉아 있고 별빛이 앉아 있고 달빛이 앉아 있"는 여자, "낙엽이 앉아 있고 적막이 앉아 있어도" 여자인 여자다. "푸석하니 토방에 엉거주춤 걸쳐 앉"아 있는 저 여자는 평생 동안 "묵묵히" 엄마로 살아온, 당신 앞의 바로 그 사람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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