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 독립군 승리했지만 해체 계기도 돼"

신주백 독립운동사연구소장 기고 "지휘 체계·부대 편제 유지되지 않으며 내적 한계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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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배급사 쇼박스는 올여름 영화 ‘전투’를 개봉한다. 독립군이 일본 정규 군대로부터 처음 승리했다고 전해지는 봉오동전투를 다룬 작품이다. 배급사는 “기적을 만든 독립군들의 나흘간 사투를 담았다”고 소개했다. 이 전투는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 투먼(圖們) 일대에서 벌어졌다. 많은 문서와 기록들은 홍범도가 주도한 독립군 연합세력이 일본군을 제압해 사기가 높아지고, 조직이 정비됐다고 강조한다. 이런 평가는 온전히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계간지 역사비평 최신호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다시 보기'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봉오동전투에 참가한 양측 인원과 사상자 수조차 부정확한 정보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군 부대가 승리한 전투로 요약되는 봉오동전투를 1920년의 임시정부 독립전쟁론이라는 시각으로 들여다보자고 제안했다.

기고에 따르면 안창호는 1920년 1월1일 신년 축하회에서 ‘신년은 전쟁의 년(年)’이라는 제목으로 축사를 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독립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신 소장은 “독립군이 넓은 만주에서 왜 봉오동을 전투 장소로 골랐는지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봉오동은 풍부한 물과 독립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주민도 대부분 조선인인 동만주의 독립군 기지였다”고 설명했다.


봉오동전투에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안무가 주도한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전투 주체였다. 신 소장은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격파해 봉오골 골짜기를 지켰기에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서도 “봉오동전투가 끝난 뒤 대한북로독군부 지휘 체계와 부대 편제는 유지되지 않았고, 내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한북로독군부 제2중대는 봉오동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퇴각할 때 사격을 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빠졌다. 신 소장은 이로 인해 독립군이 피해를 봤다고 역설했다. 그는 “최진동은 전투 대열을 무너트린 홍범도의 선택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라며 “홍범도는 게릴라 투쟁 방식으로 전투를 지휘했지만, 최진동은 정식 군대처럼 진지전을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최진동을 포함한 최씨 3형제는 봉오동 땅의 소유자로서 홍범도 부대가 봉오동에 주둔할 때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제공했다”며 “봉오동 기지를 떠나 연길현으로 이동한 홍범도의 행동에 호의적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봉오동전투는 전황(戰況)상 독립군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면 독립군 해체의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신 소장은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성공시키기 위한 최대 관건을 '군사'로 보았고, 군대 편성을 매우 중요시했다”면서도 “독립군은 일본 침략에 맞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연이어 치르면서 동만주에서 밀려났고, 무장력에서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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