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본 사람과 못 본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언젠가 네팔에 다녀온 가톨릭 신부가 사석에서 해준 이야기다. 멋진 표현이라 여겨졌다. 눈 덮인 고산준봉의 영성(靈性)을 직접 본 감격을 압축한 한마디지 싶어서였다.
"이 세상 사람들은 독자와 저자로 나뉩니다." 10년도 더 전에 첫 서평집을 냈을 때 어느 출판인이 들려준 덕담이다. 이 역시 공감했다. 글 쓰는 데 자신감도 조금 더 붙었을뿐더러 책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으니 말이다.
이것, 이분법(二分法)의 예들이다. 세상 만물과 현상을 P와 P 아닌 것으로 나눠 사고하고 이해하는 이분법은 이처럼 흔히 쓰인다. 이유가 있다.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일도양단(一刀兩斷), 딱 둘로 나누니 간단하다. 이해하기에도 쉽고 명쾌하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분법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는 농담이 나왔을까.
이 이분법이 그 변종인 흑백논리로 이어지면 아슬아슬하다. 흑백논리는 옳고 그름을 무 자르듯 변별하는 방식이다. 어릴 적 병정놀이를 기억하는가. 여기선 우리 편은 선하고 정의로운 반면 남의 편은 악하고 불의하다. 이른바 좋은 나라, 나쁜 나라 논리다. 나름 장점이 있다. 피아(彼我)를 선명하게 구분해 아군을 결집하는 데 유용하며, 호소력이 크다. 하지만 단점 역시 분명하다. 세상사는 이처럼 흑과 백, 둘로 나누기에 만만치 않다. 오히려 양분하기에 적절치 않은 일이 더 많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이성적 사고가 끼어들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와 남, 흑과 백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또 다른 해법은 없는지, 절충론 또는 타협안은 없는지 차분히 따지고 들다간 '회색분자'란 손가락질을 당할 따름이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상대편을 몰아붙여야 할 상황에서 흑백논리에 대한 이견은 기껏해야 손가락의 거스러미 취급을 당한다.
이 위태로운 사고방식이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한국 정치에서 자주 눈에 띈다. 가까운 예로 부산의 '강제징용 노동자상' 철거 시비가 그렇다. 민노총 등은 노동자상 철거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15일 부산시청에서 농성을 하면서 "노동자상 철거는 친일"이라 규정했다. 이는 친일을 잣대로 선과 악,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전형적인 흑백논리를 동원한 것이다. 이런 식이면 '친일'로 몰린 쪽이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 된다. 결국 17일 부산시는 '백기'를 들었다.
좋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는 것이 어떤 의미와 효과가 있는지, 그것이 국제 외교 관례에 걸맞은지는 제쳐두자. 왜 이제 와서 새삼 부산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려는지, 과연 민노총이 앞장서야 하는 일인지도 따지지 말자. 그런데 친일(親日)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규정하고 지탄하는가.
일본을 대하는 자세엔 여러 층위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항일(抗日), 일본의 문물ㆍ사상을 배척하는 배일(排日)이 있는가 하면 일본을 제대로 알자는 지일(知日)과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뛰어넘자는 극일(克日) 등등 말이다. 친일만 해도 무조건 일본을 찬양하고 숭모하는 것에서 21세기에 국익을 위해 선린우호를 도모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배일을 위해 일제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자면 우리 사회를 거의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내 편과 네 편 사이에서 선명한 입장을 강요받고 있다. 절충론이나 그때그때 시시비비를 가리는 이들은 회색 논리, 회색분자라 해서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세상은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담(濃淡)이 다른 '회색'들이 있다. 그뿐이랴. 빨강ㆍ노랑ㆍ파랑 등 다양한 유채색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 아닌가. 적어도 회색이 들어설 자리를 허용해야 할 이유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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