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불꽃 같은 풀꽃…유관순 열사의 삶이었죠"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주연 고아성

[라임라이트]"불꽃 같은 풀꽃…유관순 열사의 삶이었죠" 원본보기 아이콘

"문자 그대로 독립은 외롭더이다" 격한 감정에 인터뷰 도중 2분간 아무 말 없이 눈물 흘려

사실적 표현 위해 한 달 간 밥 거의 안 먹어…후반부 연기 때는 닷새 간 물조차 마시지 않아


지문번호 87767-28768, 명치(明治) 35년 12월17일생, 신장 5척(尺) 6촌(寸).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앞면에 적힌 개인 정보다. 아래에는 붉은 벽돌 벽과 쇠창살을 등지고 찍은 사진 두 장이 붙어있다.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병색이 완연하다. 하지만 자세는 암사자처럼 당당하다. 눈빛 또한 이글거려서 어떤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이 순간을 흑백으로 비추면서 시작한다. 유 열사가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돼 보낸 1년여를 다룬다. 3ㆍ1운동으로 붙잡혀 온 사람들 때문에 감방은 다리를 뻗지도 못할 만큼 비좁다. 이불은 네 사람 앞에 하나. 얼굴을 덮으면 무릎까지 다리가 나올 만큼 짧다. 주식은 쌀 10%, 조 50%, 콩 40% 비율의 혼식(混食)에 소금과 무장아찌 두어 쪽이 전부다. 가혹한 수감생활로 항일지사 대부분은 1년만 옥고를 치르면 심한 병에 걸렸다. 고문 후유증이 도져 반신불수가 되기 일쑤였다.


배우 고아성(27)은 유 열사를 연기할 자신이 없었다. 피상적으로 생각해온 숭고한 일대기에 부담을 느꼈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플라톤의 격언에서 용기를 얻었다. "인간사에 완전한 진지함이란 없다." 고아성은 "유관순 열사도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듯싶다"고 했다.


"그녀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면서 인간적인 면면을 볼 수 있었다. 신념이 강한 여인보다 공존의식을 갖고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렇게 표현하다보면 유관순 열사의 진심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임라이트]"불꽃 같은 풀꽃…유관순 열사의 삶이었죠" 원본보기 아이콘


이 영화에서 절정은 3ㆍ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만세시위다. 유 열사가 선도해 일으킨 시위에는 3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했다. 변기 뚜껑으로 철판 벽을 두드리는 소리, 발길로 문짝을 차는 소리로 감옥 안이 요란했을 뿐만 아니라 모화관, 냉동, 애오개, 서소문 등 감옥 바깥으로도 시위가 퍼져나갔다. 유 열사는 이전에도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고 한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그대로 따랐다.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2004년 발간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에 따르면, 유 열사는 그때마다 끌려 나가 발길로 채이고 모진 매를 맞았다. 항상 허리를 감싸 안고 고통스러워했다. 병천에서 붙잡힐 때 창에 찔린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계속 고름이 흘러나오던 터였다. 수시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몸이 성한 날이 없었다. 대들다가 간수들에게 두들겨 맞아 자주 의식을 잃었으며 방광이 파열되기도 했다. 유 열사의 선배이자 지도교수였던 박인덕(1896~1980년)은 이러다가 유 열사가 죽겠다고 생각했다. 청소하는 수감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권고를 전했다.


"만세 부르는 것도 좋으나 몸만 상하고 효과는 적다. 뿐만 아니라 동지들의 신상에도 관계가 되는 것이니 제발 만세를 그만 불러라."


[라임라이트]"불꽃 같은 풀꽃…유관순 열사의 삶이었죠" 원본보기 아이콘


간곡한 권고를 받은 유 열사는 그 뒤로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구타와 고문으로 이미 몸은 망가져 있었다. 대부분의 애국지사들이 특사로 풀려나 유 열사와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온 이신애(1891~1982년)는 얼마 뒤 유 열사마저 저세상으로 떠나자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녀는 당시 심정을 이 같이 표현했다. "문자 그대로 독립은 외롭더이다." 고아성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는 물음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2분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입을 떼었다.


"그런 감정이 마음에 짙게 남아있는 듯하다. 유관순 열사가 옥중에 갇혀서 느꼈을 감정을 하나하나 짚었기에 조금이나마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촬영하는 한 달 동안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후반부를 연기할 때는 닷새간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풀꽃처럼 가냘픈 생명이지만 시대의 어둠을 사르는 '불꽃'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의 저자인 이정은 박사가 유 열사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느낀 그대로다.


"절망의 우물 속에서 희망을 두레박질했고, 자유의 값으로 생명을 지불했으며, 마침내 감옥 안에서 꽃처럼 떨어져 누움으로써 억압하는 자의 역사에 부끄러움을 새기게 해 주었다. 자유를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도, 팔지도 않았던 까닭에 일본 제국의 위세는 그의 육신을 가둘 수는 있어도 정신은 결코 가두지 못했다."


[라임라이트]"불꽃 같은 풀꽃…유관순 열사의 삶이었죠" 원본보기 아이콘


영화에서는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8호실에 수감된 사람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는 얼굴에서 진심이 묻어난다. "가장 부담스러운 장면이었다. 달력에 촬영하는 날을 표시하고 초조하게 기다릴 정도였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뗐는데, 무거운 공기와 함께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마주한 배우 스물네 명이 진심을 다해 경청해준 덕에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지만, 가엾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왜 그녀는 외롭게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을까.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옥중에서 유 열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어윤희(1881~1961년)의 회고는 답이 될 수 있다. "관순이는 모든 사람들한테 순진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일했다. 감옥에서 무슨 일도 성의껏 해서 모든 사람들한테 신임을 받았다. 어린 애가 무슨 일이든지 충직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나는 유관순같이 충직하고 책임감 강하고 의에 사는 그 같은 순진한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고 이때까지 지냈다."


[라임라이트]"불꽃 같은 풀꽃…유관순 열사의 삶이었죠" 원본보기 아이콘


유 열사는 동생과 가족에 대한 걱정, 외로움과 배고픔, 옆구리의 고름이 멈추지 않는 고통에도 슬픔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임명애라는 여성이 아이를 낳고 다시 감방에 들어오자 정성을 다해 보살핀 일화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동짓달 엄동설한에 기저귀가 얼른 마르지 않자 뻐적뻐적 언 기저귀를 몸에다 감아 차고 녹여줬다.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의 영역을 발견한다. 유 열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감옥 안에서조차 친절과 선행을 베풀며 영원한 한 줄기 빛으로 남았다. 우리 민족사에 새겨진 자유의 발자국으로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