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느리게 걷는 밤산보길/박형준

나는 천변에서 밤산보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흩어졌던 오리들이
물가에 서로 모여 깃털을 붙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앞에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는 중년 사내가
전기 대신 손으로 바퀴를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사내는 잠깐잠깐 휠체어를 멈추고선
천변의 꽃 쪽으로 허리를 숙이곤 하였다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꽃들에게 얼굴을 내밀고선
꽃들이 잘 자는지 숨 냄새를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자전거도로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나아갈 것 같았다

나도 옆을 바라보며 느리게 걷는
밤산보길이었다
사내의 뒤에 한 걸음 떨어져서
밤오리처럼 가까워져서 옆에서 나는 밤길 냄새를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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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나니 알겠다. 늦은 밤 귀가한 아빠가 왜 현관문을 열자마자 윗도리도 벗지 않은 채 새근새근 잠든 아가에게 달려가 얼른 볼을 대어 보는지, 그리고 그런 남편 곁에 누운 아내가 잠들기 전 왜 한동안 남편의 이마를 가만가만 짚어 보는지. 그건 그저 그만큼 보고 싶었다거나 혹은 다만 그만큼 걱정했다는 말로는 한참이나 모자라고 모자라는 일. "숨 냄새"를 살핀다는 건 서로를 꽃처럼 생각하는 일. 이렇게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는 일.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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