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린다 카터 vs 갤 가돗
TV 드라마 시리즈 '원더우먼' 스틸 컷
여권신장 대변하지만 남성의 성적 욕망·美 패권주의에 얽매여
건강한 매력으로 스타덤 오른 카터…여성우월주의 외치지만 내내 수동적
과감한 액션 뽐내는 가돗, 세심한 감정연기 부족…시오니스트 논란도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원더우먼'은 슈퍼맨, 배트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슈퍼 히어로다. 원작자인 윌리엄 몰튼 마스턴(1893~1947년)은 "강인한 초능력과 선량한 아름다움을 겸비한 캐릭터로 여성을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싶다"고 했다. 여권 신장을 대변하는 듯했지만, 그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남성의 성적 욕망과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핀업걸을 연상케 하는 딱 붙는 뷔스티에(어깨끈이 없이 허리까지 이어진 브래지어)와 성조기를 본뜬 파란 팬츠. 밧줄에 포박되거나 사슬에 묶이기 일쑤인 원더우먼은 엉덩이를 채찍질당하며 기기도 한다.
거짓말탐지기의 발명가이기도 한 마스턴의 은밀한 취향이 반영됐다. 그는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지만, 본디지(결박)에 집착한 변태였다. "여성은 묶이기를 좋아하는 존재"라고 말했을 정도. 두 여성과 중혼해 함께 살았는데, 그녀들의 심리학 논문을 가로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원더우먼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산물이었다.
영화 '원더우먼' 스틸 컷
여성우월주의가 반영됐지만 페미니즘 내부에서조차 논란이 된 원더우먼은 이야기마저 평면적이어서 실사화에 애를 먹었다. 빈틈은 배우들의 다채로운 매력으로 채워졌다. 드라마 시리즈 '원더우먼(1975~1978년)'으로 스타덤에 오른 린다 카터(66)는 1972년 '미스 월드 USA'의 우승자다. 검은 머리와 뚜렷한 이목구비, 풍만한 가슴 등으로 별다른 가공 없이도 만화 속 캐릭터의 건강한 매력을 발산했다.
'슈퍼맨(1978~1987년)' 시리즈로 유명해진 크리스토퍼 리브(1952~2004년)는 "카터만큼 만화 속 원더우먼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카터의 외모에서 여성 투사의 느낌은 찾기 어렵다. 몸은 가랑잎같이 말랐고 얼굴은 선하기 그지없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액션도 어설프다. 헬기에 매달리는 등 투혼을 발휘하지만 주먹을 날리는 모습조차 어색하다. 뉘른베르크 유도 챔피언으로 소개되는 나치 스파이 마샤와의 대결 장면을 보자. 책상 위에서 멱살잡이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다. 어설픈 발차기에 뒤로 넘어진다. 겨우 그녀를 제압한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한다.
"나치는 여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여자를 무시하는 문명은 쇠퇴하게 돼 있지. 여자가 미래의 주역이야."
TV 드라마 시리즈 '원더우먼' 스틸 컷
원더우먼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녀의 행위가 여권신장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스티브 트레버(라일 와고너)가 저지르는 일들을 수습하기 바쁠 뿐, 주도적으로 사건을 이끄는 경우가 거의 없다. 브라운관 밖에서 카터는 훨씬 능동적이었다. 그녀는 자선활동에 적극적이다.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고생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 질병의 연구와 유방암 예방을 위해 전국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동성애자 행진의 대수호자(Grand Marshall) 역할을 맡는 등 여성들의 낙태권과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힘썼다. 카터는 섹시스타라는 평가를 싫어한다. "나는 내 남편 이외 누구에게도 섹시한 대상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원더우먼이 가진 본질은 그녀의 슈퍼파워가 아니에요. 따뜻한 마음과 지성, 그리고 선의를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정수죠."
지난달 31일 개봉한 영화 '원더우먼'에는 카터의 생각이 반영됐다. 원더우먼이 드라마 시리즈보다 훨씬 능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하지만 아마존 여전사로서의 기개보다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의 이상과 사상에 끌려가는 흐름은 변함이 없다. 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활보하지만, 별다른 갈등이 없는 단순한 전개는 원더우먼의 매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다. 진보된 컴퓨터그래픽 기술 덕에 슈퍼 히어로의 면면만 부각된 느낌이 강하다. 어린 시절 원더우먼이 새겨진 학용품으로 공부하던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
영화 '원더우먼' 스틸 컷
패티 젠킨스 감독(46)은 "원더우먼은 어두운 캐릭터가 아니다. 긍정적인 힘을 전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따뜻한 사랑의 본질을 유지할 때만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원더우먼을 연기한 갤 가돗(32)이 이 구조적 간극을 최소화했다고 확신한다. "그녀보다 적합한 배우를 찾을 수 없었다. 미소를 짓거나 누군가에게 인사를 할 때 모습은 살아있는 원더우먼의 전형이다. 아름답고 힘이 넘치며 친절하고 생각이 깊다."
가돗은 2004년 미스 이스라엘의 우승자다. 근육질의 몸매는 아니지만 오토바이를 즐겨 탈 만큼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쿵푸, 킥복싱, 검술, 주짓수 등을 연마해 드라마 시리즈보다 몇 갑절 과감해진 액션을 제법 잘 해낸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얼굴선은 여성 투사의 느낌도 강하게 풍긴다. 그녀의 눈매는 미소를 지을 때 확 달라진다. 초승달처럼 가늘고 예뻐진다. 호기심 많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원더우먼의 마음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 '원더우먼' 스틸 컷
문제는 연기력이다. 가돗은 시종일관 현란한 액션을 뽐내지만, 원더우먼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특히 분노를 폭발시키는 절정의 신에서 얼굴이 이전과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특유의 대사들이 드라마 시리즈보다 더 어색하다. 주체적인 성격이 크게 보완됐으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가돗은 "사람들은 75년간 코믹북, 드라마 등을 통해 형성된 원더우먼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 현재의 원더우먼을 기대하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모든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발목을 잡는 요소는 한 가지 더 있다. 시오니스트(극단적인 유대 민족주의자) 논란이다. 2014년 이스라엘 방위군이 가자 지구를 폭격해 2000여 명의 사망자를 냈을 때 이스라엘을 응원하는 글을 써서 지탄을 받았다. 이스라엘을 적국으로 규정한 레바논은 이 발언을 문제 삼아 원더우먼의 상영을 금지했다. 세계 평화를 수호하지만, 여전히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원더우먼의 현 주소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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