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 어느 구필(口筆)화가의 시선(視線)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축구선수였다. 움켜쥘 수 없을 정도로 퍼덕이는 열정으로 준마처럼 운동장을 질주했을 것이다. 잘 하는 선수였다. 강원도 강릉에 살다가 차범근을 배출한 축구 명문 경신고에 입학해 뛰었다.

그래서 그가 맞은 불행은 흑과 백처럼 더욱 도드라진다. 아니 백과 흑처럼. 1991년 여름,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졌고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다. 당시 그의 고통은 바닥을 짐작할 수 없어 가늠되지 않는다. 삶은 때로 설명하기 힘든 잔혹한 이빨을 드러내고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짓이긴다. 지독하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기에, 어찌 보면 세상은 지뢰밭이다. 불길처럼 타올랐을 그의 육체는 차갑게 식었다. 한 때 준마는 누워만 있었고 때로 가족들에게 “차라리 죽여달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어쩌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추락 뿐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아직 어렸었다.

하지만 삶은 또 한 줄기 빛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3년 봄날에 그림이 취미였던 누나의 도움을 받아 연필을 입에 물고 시작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부모님들은 울면서 웃었다고 한다. 축구가 사라진 자리에 그림이 들어왔다.

붓에 묶은 나무젓가락을 물고 그렸다. 입안이 부르트고 때론 피가 고인 채 그렸다. 미대에 들어갔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비장애인들의 손보다 그의 입은 위대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한 여러 대회에서 수상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구필(口筆)화가 박정씨다. 얼마 전 정부청사에 전시된 그의 그림을 봤다. 당최 그림 보는 재미를 모르고 살아온 문외한의 가슴에도 알 수 없는 공명과 아릿한 파문이 일었다. 정부청사라는 딱딱한 공간에 걸린 그의 그림은 명백히 대비됐다. 그리고 와이프에게 이끌려 찾아간 ‘한국구상대제전’에서 그와 그의 그림을 다시 만났다. 물론 그의 그림을 다시 볼 지도, 그가 휠체어에 앉아 있을 줄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전시장 한 켠에는 투명한 통 안에 화가가 그동안 사용해온 수백개의 나무젓가락이 쌓여 있었다. 그의 고통과 환희가 고스란히 담긴 듯 했다.

그는 시선(視線)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여인이 관객을 물끄러미 응시하거나 어딘가를 바라보거나, 혹은 등을 돌린 채 바라본다. 묘하게 마음이 일렁인다. 화가의 표정은 그림만큼이나 고즈넉했다. 한때 저주했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그렇게 이제 평온을 찾은 듯 했다. 가을이 깊어간다. 나, 그리고 당신의 시선은…어떤가요.

박철응 금융부 차장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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