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선배의 전화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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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라며 걸어온 전화 속 목소리에 위엄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기수로 한참 위이고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기에 직접 본 적이 없는 분이지만 공손하게 전화 통화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은 그가 자기가 다니는 방송사에서 만든 것이라며 아주 비싼 어학교재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습니다. 입맛이 썼습니다. 학교 동문 관계를 귀중히 여기는 문화를 이용한 지능적인 사기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 사회가 지역ㆍ학교ㆍ직장의 인연으로 짜인 매우 촘촘한 관계망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이 때로 피곤해하면서도 이 관계망에서 쉽게 이탈하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와 인맥관리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통념 때문입니다. 여러 조사에서 직장인들은 개인적인 업무역량보다 인간관계와 인맥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최근 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사회관계망과 사회적 자본 이론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들을 통해 검증되고 있기도 합니다. 연구자들은 좋은 사회관계망을 가진 사람들은 건강, 직업, 자산규모에서 실제로 더 나은 성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꾸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에 좋은 사회적 관계를 가지게 됐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요.

이런 연구들에 기대어 보면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하고 아이를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합리적인 투자인 셈입니다.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잠재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친구들과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이가 재벌 3세가 두엇 다니는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는 대통령의 조카가 재학 중인 곳에 다닐 수 있도록 이사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자기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산이겠느냐고 자랑스러워하더군요. 그러나 유치원 친구와의 친분이 과연 평생 이어질지 궁금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또 어떻습니까. 제가 비교적 여러 학교와 직장을 옮겨다닌 데다가 최근 이런저런 직책을 맡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카톡이나 문자, 이메일을 통해 날아오는 여러 가지 모임 초대를 일정표에 표시하다보면 호젓한 저녁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때로 업무에도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모임에 욕 안 먹고 빠질 수 있을지 자주 고민합니다.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삶을 꿈꾸지만, 그러다가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관계의 확장을 즐기는 분들을 보면 기가 죽곤 합니다. 세상에는 약속을 주도하고, 새로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고, 지인의 경조사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마당발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분들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망의 허브 역할을 하는 이들이지요.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분들이지요.

최근 세상을 떠나면서 큰 뉴스거리가 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명절과 휴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외부인과 조찬을 했고, 하루 평균 다섯 번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광범위한 인맥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인간관계가 사업 성공의 핵심 요인이라고 자서전에 쓰기도 했다지요. 심지어 백면서생인 저도 그분의 소식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과 친하다고 알려졌던 많은 이들이 사실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손을 내젓기 바쁩니다. 넓은 인간관계란 무엇인지,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어느 날 제가 가진 '쓸모 있음'이 사라질 때 같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제 인간관계들을 꼽아봅니다. 서늘한 봄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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