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교과서 한자병기 '탁상행정' 논란

신중한 교육적 논의 없어…"조기 영어교육처럼 사교육 부작용" 우려

[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 교육부가 지난달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교과서에 한자 병기(倂記)를 늘려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한자를 병기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발표해 한글학회와 관련 시민단체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교육부가 현재 중학교부터 진행되는 한문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초등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제568돌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오전 한글문화연대와 한글학회 등 56개 한글문화·학부모단체는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 방침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교육부의 한자병기 정책이 강행되면 어린 학생들의 학습 부담은 늘고 사교육만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2009년부터 초등학교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한자를 가르치는 초등학교가 늘어나면서 한자를 가르치는 유치원이 생기고, 유치원생을 한자 급수 시험에 응시하게 만드는 곳이 늘고 있다"며 "조기 한자교육 때문에 조기 영어교육에서 이미 경험한 폐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실제로 교육부의 발표 이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한자 사교육 열풍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한자 학습지로 널리 알려진 J업체의 경우 홈페이지에 '2018년 초등 3·4학년부터 교과서에 한글과 한자 병기'라는 공지사항을 띄워놓고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2021년 수능 필수 과목 도입을 언급하며 자사 학습지를 통한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자교육은 이번 새 교육과정 확정 이전에도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서 영어 조기교육과 마찬가지로 7~8세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돼왔다.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윤모(39·인천)씨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사회나 과학 등에 한자 어휘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니 저학년 때 학습지 등을 통해 한자를 익혀둬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며 "학원이나 업체에서 한자능력 검정시험을 통해 6~7급 자격증 등을 취득하라고 부채질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이러한 분위기가 일부에 조성돼 있는 상황에서 교육부의 한자 병기 방침은 한자 사교육 열풍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한자병기 교육의 필요성이 인정되더라도 현재 중학교부터 실시하고 있는 한문 수업에 대한 평가도 없이 무턱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려는 것은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정희 서울상현초등학교 교사는 "한자를 병기하는 것만으로 어떤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제대로 연구된 사례도 없는 데다 모국어 교육에 대한 체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어 조기교육에 한자 조기교육까지 더해지면 아이들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 교사는 "현재 한자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경우 교육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 한자를 모양대로 '따라 그리는' 수준에 그쳐 결국 학업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신중한 교육적 논의가 없는 교과서 한자병기로는 한자교육이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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