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 습격]여성에 관하여(136)

가끔 내가 여성의 내면을 지니지 않았나 생각해볼 때가 있다. 오랫 동안 나는 여성의 꽁무니를 쫓아다닌 것 같다. 첫사랑이 참담한 패배를 맛본 이후에 여자들은 나의 내면에서 여러 권의 책으로 된 신화가 되었다. 의정부의 어느 겨울 새벽엔 내 뒤를 미행하는 흰 여우를 만났다. 나는 이 짐승이 나 스스로라고도 생각해보기도 했고, 평생을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완전한 요(凹)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나는 평생 내 안으로 몰입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원심력에 시달리는 존재인지 모른다.

딸들을 낳은 이후로, 나는 더욱 여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졌다. 외숙모에게서 느꼈던 완전함과 외로움, 깊이 있는 품격과 원형적인 야함. 그런 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러나 여자의 에고에 대해 깊이 동의하게 되었다. 그 속에는 나를 꿰뚫는, 나를 깊이 공감하기도 하는 놀라운 시선이 있다. 물론 동시에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나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피상적인 접점에 서로 인식을 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승의 여자들에게서 몇번 실패한 이후로, 나는 죽은 여자, 아니 책 속의 여자, 관념의 여자, 상상의 여자들에게 몰입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기록으로 남은 여인들은, 내 관심과 내 감각과 내 생에 응답을 성실히 할 뿐, 배신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나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고맙고 든든하다. 어제 어디선가 한 화백이 그린 옛 여인의 수많은 그림들을 찾아내서, 열심히 프린트를 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 어느 길에서 다시 만날 듯한 그 서러운 여인. 내 여인이 거문고를 뜯으며 혹은 칼춤을 추며 혹은 저고리를 덮어쓴 채 먼길 을 가며,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한 십년, 아니 그 전부터 나는 저 여인의 내면 속에 들어앉아 방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게 시는 저 여인이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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