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 회고록 "제국주의 야욕이 부른 참사..평화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도 희생자를 추모하고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국은 2010년부터 100주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해오고 있으며, 패전국인 독일에선 대규모 기념행사는 없지만 베를린 국립도서관에서 전쟁 당시 편지와 사진 등을 모은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 달 열린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도 전쟁 100주년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했으며, 여기에 국내 만화가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만화를 대거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해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 선언으로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 세계전쟁이자,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10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은 순식간에 세계를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으로 나눠버렸다. 제국주의적 야욕을 가진 유럽 열강들의 패권 다툼에 31개국이 동참했으며, 그 결과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상자만 3000만명에 이른다. 이 광기의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에 대해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저서 '어제의 세계'를 통해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1942년 독일어로 처음 출간된 '어제의 세계'는 국내에서는 1995년에서야 번역 출간됐다. 올해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일부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고 사진 자료를 보완해 재출간됐다. 제1차, 그리고 제2차 전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츠바이크는 "다음 세대에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전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이 회고록을 남겼다. 최근의 동아시아 정세를 볼 때 그의 책이 오늘날 다시 새롭게 조명받게 된 점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1881년 오스트리아 빈 출생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럽 최고의 인문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특히 전기작가로도 명성을 날렸는데, 로맹 롤랑,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스탕달, 톨스토이, 프로이트 등의 인물이 츠바이크에 의해 재평가됐다. 1차대전 직후 히틀러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 그리고 '유태인' 작가였던 그의 책을 불살라버리기도 했다.
츠바이크는 1934년 빈을 떠나 런던, 브라질, 미국을 거쳐 1941년 브라질에 정착했다. 그러다 히틀러의 광기가 절정에 이르고,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2년 2월 츠바이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 여러분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빕니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 그가 쓴 유서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어제의 세계'는 그의 유작이 됐다.전쟁의 한복판에서 그 시기를 기록한 츠바이크는 이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 증인의 입장에서 세세하게 써내려간다. "어찌하여 유럽이 1914년에 전쟁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자문해 본다면, 이성에 맞는 단 하나의 이유도, 단 하나의 동기도 찾아낼 수가 없다"고 츠바이크는 고백한다. 또 "인플레만큼 독일 민족을 분격시키고 증오심에 차게 하고 히틀러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없었다"고도 진술한다. 이성이 패배하고 광포한 야만이 승리하는 광경을 목도한 이 지식인은 자신이 맹신했던 '평화', '진보', '합리'의 정신이 꺾여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먹는다. "이성에 대한 과신이 우리의 과오였다"고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나는 거대한 대중의 이데올로기가 내 눈 아래서 퍼져 가는 것을 보았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러시아의 볼셰비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최악의 흑사병, 즉 우리 유럽 문화의 만발을 가로막고 마비시킨 국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훨씬 전에 잊혔다고 믿었던 야만 상태로 인류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나는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전쟁이 일어나지 전의 유럽 상황과 전쟁의 진행과정 등을 진술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 기간 츠바이크가 당대 예술가, 사상가들과 있었던 일화들을 소개하는 부분은 작품이 가진 무게와는 별도로 상당한 재미를 안겨다준다. '알프스 교향곡'의 주인공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를 만나 70세가 된 자신이 더 이상은 음악적 영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진리를 열광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이 세상에 100%의 진리는 없다"고 인정한다. 이밖에도 오귀스트 로댕,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막심 고리키, 베네데토 크로체, 앙드레 지드 등 19~20세기 거장들이 츠바이크와 교감을 나눴다.
츠바이크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아무런 자료도 없이 순전히 기억에만 의지해서 쓴 책이 바로 이 '어제의 세계'다. 죽음을 결심하고 그가 어떤 절박한 마음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을지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나름의 의식으로 그의 책을 펼쳐 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것이다. (어제의 세계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1만8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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