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 "대표팀 평가전 완패, 좋은 약이 될 것"

김남일[사진=전북현대 제공]

김남일[사진=전북현대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김흥순 기자]2001년 8월 15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한국 축구 A대표팀이 체코와의 원정 평가전에서 0-5 대패의 수모를 당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던 김남일(37·전북)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경기라고 꼽는다. 김남일은 0-1로 뒤진 상황에서 우리 골문을 향해 드리블 및 백패스를 하다 공을 빼앗겨 추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대패에 대한 비난이 모두 그에게 쏟아졌다.

13년이 흘러 김남일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악몽의 순간을 다시 떠 올렸다. 0-4 패(멕시코전), 0-2 패(미국전). 홍명보호의 잇따른 평가전 참패가 김남일의 기억 장치를 건드렸다. 김남일은 "그 당시 죽고 싶었다. 백패스로 실점했을 때 경기를 뛰면서 '나는 여기서 끝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남일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도 체코전에서 풀타임 활약하며 그라운드를 지켰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이후 한 번도 김남일의 실수를 언급하지 않았단다. 김남일은 "그 상황에서 고마웠던게 감독님이 나를 90분 동안 믿어주신 것이었다. 내가 교체돼 나왔다면 내 축구인생은 끝났을 것이다. 풀타임을 뛰고 이후에도 계속 경기에 나갈 수 있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패를 경험해본 사람이 대패를 당한 대표팀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아는 법이다. 김남일은 멕시코, 미국과의 2연전을 지켜보며 대표팀 후배들이 겪었을 심적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렸다. 그는 "전반에 2~3골을 먹으면 정말 경기를 하기 싫다. 시간만 보게 된다. 후반에 더 실점하면 자기 컨트롤이 안된다. 조직력이 결코 살아날 수 없다.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다.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에겐 위기가 기회였다. 체코전 대패의 충격을 딛고 김남일은 한-일월드컵에서 맹활약해 4강 신화의 주역이 됐다. 김남일은 소중했던 경험을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어했다. 평가전 대패가 홍명보호에 큰 반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그는 "내가 실수했을 때 감독님이 믿음으로 자신감을 주셨다. 나에게는 그 상황이 오히려 약이 됐다. 미리 대패를 한 경험이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이어 "대패를 당하게 되면 선수단 사이에서 위기의식이 생긴다. 오히려 배포도 생기게 된다. 큰 경기에 나가도 위축되지 않게 된다. 더 큰 점수차 대패가 됐어도 괜찮았다.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대패는 분명 잃는 것보다 얻는게 많다"며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김흥순 기자 spor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