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기술·산업의 뒷풍경①]전화기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산업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상품에 대한 스토리다. '전화기'부터 시작해보자.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유선전화 가입자 수는 1800만명,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5300만명(방송통신위원회 집계)이다. 1인당 1개 이상의 전화기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중국 톈진 유학생 상운에 의해서였다. 그해 3월에 귀국하면서 전화기와 전선 100m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험통화가 이때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화기는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전에도 '텔레폰'의 이름을 빌려 '다리풍(다釐風)' '덕율풍(德律風)' '어화통(語話筒)' 등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1893년 11월에는 지금의 세관인 총해관에 "일본 동경에서 구입해 들여오는 전화기와 전료(전화기 재료) 등을 면세하라"는 정부 공문이 내려온 적이 있다. 이는 궁궐 안에 전용전화를 가설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자석식 전화기가 1896년 덕수궁 내부에 설치됐다.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인천까지 개통됐는데, 전화기 덕분에 생명을 구한 청년이 있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김구 선생은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일본 육군 중위를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안 고종이 인천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형집행을 중지시킨 것. 놀랍게도 이날은 전화가 개통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개통이 조금만 늦었어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1902년 3월에는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공중전화가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설됐다. 당시 전화요금은 5분 통화에 50전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전화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일본에서 들여온 전화가 일제의 침략수단이라 여겼고, 심지어 가뭄이 드는 것까지 전화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후 정부는 통신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서울과 개성, 개성과 평양, 서울과 수원 등으로 통화권을 확대했다. 1905년 가입자 수가 80명으로 늘며 발전 추세를 보이던 전화 사업은 안타깝게도 그해 4월 일본에 통신 사업권을 빼앗기며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우리나라의 통신 사업은 오랫동안 암흑기를 보냈다.

국내 기술로 전화기를 처음 만든 곳은 금성. 이 회사는 1961년 자동식 전화기 '금성1호'를 개발했다. 1970년대 초반 전화기는 흔히 '흑통' '백통'으로 나뉘었다.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는 '흑통', 교환원 없는 자동식 전화기는 '백통'으로 불렸다. 백색전화는 부의 상징이었다.

전화 기술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7년 7월 전화 교환 방식이 자동식으로 바뀌며 교환원이 없는 전자 교환 시대가 열리자 한국의 전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 보급되기 시작한 무선전화기는 전화기의 혁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무선전화기는 오늘날 휴대폰의 모태가 됐다.

휴대폰의 발전과 함께 유선전화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바빠진 현대인의 생활, 1인가구의 증가 등으로 유선전화는 점점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유선전화의 자리를 세계 최고 품질의 휴대폰이 지키고 있으니, 유선전화의 뒷모습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김혜원 기자 kimhy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