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詩]황지우 '나는 너다 42-1'

이곳을 먼저 다녀간 누군가가
흰 석회벽에 손톱으로 써 놓았다
날개, 날개가 있다면

황지우 '나는 너다 42-1'

■ 황지우가 연작시들의 제목을 '나는 너다'라고 붙였던 80년대에, 나는 저 간단한 문장의 심각함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시아경제는 며칠전 '그섬, 파고다'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헤드라인으로 '나는, 너다'를 붙였다. 세상에 개별자로 태어나,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함께 행동하고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일이란, 불가능과 기적들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너일 수 있는가. 신체적으로 너일 수는 없지만, 마음은 온전히 너일 수 있는가. 사랑은 그런 상태를 만들어내는가. 감옥벽에 써놓은 절망의 저 말. "날개, 날개가 있다면"을 나의 절망으로 호흡할 수 있는가. 내가 너라는 것. 내 몸까지도 네 몸과 다름없다는 것. 우린 섣불리, 그리고 시끄러울 만큼 호들갑스럽게 그런 공수표를 날려왔지만, 황지우도 자기 속으로 어떤 애인 하나 제대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했음을 뼈아픈 후회로 말하지 않았던가. 내 내면에 있는 사막의 호텔에는 불이 꺼진 채 늙어가는 주인만 웅크리고 있으며, 어떤 타인도 들어와 머물지 못하는 폐허이지 않은가. 내가 언제, 누구라도 너였던 적이 있었던가. 너는 무엇이며, 나는 무엇인가. 내 관계 속에 들어있는, 저 수많은 교착과 불통과 혼선의 너는.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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