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청하(포항)의 현감으로 부임되던 때는 1733년, 그가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이미 37세의 나이에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으로 이름을 떨친 그였다. 이곳에서 그는 경북팔경 중의 하나인 '내연산'을 보고 그 진경에 빠져들었다. 실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중국풍의 사생활에 염증을 느낀 겸재는 결국 이곳에서 진경산수화를 창시했다. 겸재가 내연산을 오가며 진경을 깨닫게 되는 이 과정은 '아름다운 걷기'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신간 '옛사람들의 걷기'는 현대인들 사이에 불고 있는 걷기 열풍의 근원을 조선시대에서 찾는다. 현대인들의 걷기가 건강과 웰빙, 혹은 힐링과 치유를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선조들의 '걷기'는 삶의 뜻을 새기고 걸음마다 깨달음을 구하는 공부의 길이자, 마음을 닦는 수행의 방편이었다. 저자 이상국은 요즘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걷기'에 이렇다할 문화콘텐츠가 없다는 점에 착안, 옛 조상들의 걷기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이야기거리는 무궁무진하다.16세기 양반집 딸로 태어났지만 기생의 길을 선택한 여인 홍낭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탁월한 시인이었지만 남편에게 버림받고 왜란 당시 한강에 몸을 던져버린 이옥봉의 비극적인 최후, 선바위 마을에 정착하면서 주변의 산과 들에 유학적인 사유세계를 표현한 이름들을 붙여가며 길을 걸었던 여헌 장현광의 여정, 개성으로 떠난 여행에서 뜻밖으로 고려왕조의 주체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조선 초기 지식인 채수와 성현의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했던 옛사람들의 다양한 '걷기'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와 픽션을 오가는 서술구조다. 저자는 자신의 취재노트를 꺼내들고 1637년 경북 포항 근처 봉계라는 곳을 찾아가 84세의 여헌 장현광 선생을 만난다. 저자는 여헌 선생이 1621년 발표한 경위설(經緯說)에 대해 물어보는데, 여헌 선생에게 "사단은 날줄이며 칠정은 씨줄이다. 그러니 사단만이 선이 아니고 칠정만이 악도 아니며, 씨줄과 날줄이 나눠지고 합해져야 베를 짤 수 있듯이 붕당도 좌우종횡으로 서로 역학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는다. 서울 인사동에서 어우동을 인터뷰한 대목도 재미를 더한다.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신분제 사회에서 어우동은 "지체 낮은 남자들은 비교적 권력적 망상이 적고 덜 위선적"이라고 평한다.
이 책에서의 '걷기'는 단순하지 않다. 저자는 우리가 걷는 '길'의 의미를 "시간이 펼쳐진 공간"이며 "역사 또한 하나의 길"이며 "세상은 길들의 집합이며 세상의 슬픔은 길들이 끊어지며 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옛사람들과 한바탕 길을 걸은 뒤 저자는 말한다. "길이 있는 한 삶이 있다. 길속에 무늬진 옛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가 지금 걷는 길의 땀내 나는 지문을 탐색하는 일이기도 하다."2013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 저작 및 출판 지원' 선정작이다.
(옛사람들의 걷기 / 빈섬 이상국 지음 / 산수야 / 1만3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