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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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제 라면 끓일 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쨀쨀거리며 나오던 수돗물이 쿨쿨거리며 공기 빠지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기어코 끊어지고 말았다. 수도꼭지를 몇 번 두드리고 때리고 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림은 낭패한 표정으로 나오지 않은 수도 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밥을 앉히기는커녕 라면 끓여먹을 물조차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밤에 쨀쨀거리던 물이라도 좀 받아둘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버스 지나가고 손 흔드는 꼴이었다. 어제 하소연이 갖다 준 토란국이 있었지만 먹을 밥이 없으니 달랑 국만 놓고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기랄....”
하림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냉장고 여기저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비워둔지 오래되었지만 혹시나 윤여사가 남겨놓은 먹을거리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여자가 살았던 흔적처럼 냉장고 속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버터와 짠지, 고추장 병이 가지런히 놓인 속에 밥 대신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냉동고 안쪽에 비닐에 싸인 작은 뭉치가 있어 열어보니 뜻밖에도 얼어붙은 밥덩이였다. 아마 먹다 남은 것을 비닐에 싸서 넣어둔 모양이었다. 하림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밥덩이를 꺼내 그릇에 담은 다음,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다. 전자렌지가 돌아가는 동안 라디오를 틀었다.생각하면 우스웠다. 누군가가 지금의 자기를 자꾸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섭거나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어쨌거나 아침밥을 먹고 나면 당장 수도부터 고쳐야겠는데, 하림은 그런 방면에 있어선 깡통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을 부르려 해도 아는 것이 없었고, 어디에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일단 윤여사에게 전화를 넣어봐야지. 자기 화실이니까 무엇이 문제인지 금방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나서 하소연이에게도 물어봐야지. 그렇지 않아도 그녀와 만날 핑계거리가 필요했는데....

밥과 국이 데워지자 하림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국에다 밥을 말아서 천천히 음미하듯 먹기 시작했다. 그만해도 다행이었다. 윤여사가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을리는 없었지만 얼어붙은 밥덩이 하나를 남겨두었다는 게 마냥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면 아침을 쫄쫄 굶고 있을 도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침을 다 먹고 난 하림은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반풍수 묘자리 더듬어보듯 다시 수도관을 따라 나무막대로 툭툭 두드리며 어디에 문제가 있나 하고 찾아보았다. 싱크대 밑도 보고, 화장실 변기 속도 보고, 밖으로 나와 마당 수도도 살펴보았다. 결론은 역시 자기로서는 알 수 없다, 였다.

그런 다음, 방으로 돌아와 윤여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재영 씨. 아니, 윤여사님. 나 하림이예요. 장하림.”
“아, 하림씨!”
윤여사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그녀의 입술이 떠올랐다.
“수도가 안 나와요.”
하림은 빚쟁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두절미하고 말했다.“수도가....?”
윤여사가 말했다. 다시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거. 얼어서 그럴 거예요. 잠궈 두긴 했지만 해마다 겨울이 지나갈 때쯤이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해요. 큰 문제는 아닐 텐데.... 암튼 알았어요. 내가 손봐줄만한 사람한테 전화 넣어둘게요. 한번 가서 봐달라고....”
윤여사는 그녀답게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다른 일은 없어요?”
하고 물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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