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프롤로그> "애들 볼까봐 그게 제일 무섭다."
최근 박근혜 정부 들어 장관 인사 청문회 등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고위직 인사들의 '부정직'한 행태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의혹, 탈세 의혹, 표절은 아예 5대 기본 메뉴로 정해져 있다. 이들 '구악'에다 최근엔 별장 성접대 의혹, 무기업체 로비스트 경력, 해외 재산 도피, 이중국적 논란 등 '신악'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구악이든, 신악이든 모두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때만 되면 터져 나오는 측근 비리, 대기업 총수들의 횡령ㆍ배임까지 고위 상류층 인사들의 각종 부도덕 및 탈법ㆍ불법 행위 등은 우리사회에 너무도 익숙한 풍조가 돼버렸다. 이 같은 고위직 인사들의 부정직한 행태는 특히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모범은커녕 왜곡된 도덕의식,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은 우리사회의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이에 대해 청소년들과 학부모ㆍ교사 등으로부터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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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직자를 비롯한 우리 사회 지도층에 만연한 부패ㆍ비리ㆍ범죄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전체가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다는 것이다. 범죄,부패,비리를 저지른 인물들이 인사청문회 등을 대충 때운 후 버젓이 장관 등 고위직이 되고, '반칙'을 한 사람들이 심판으로부터 벌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떵떵거리고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감수성엔 굳은 살이 배기고 있다. 특히 한창 예민한 청소년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고위직 인사들의 각종 부패와 비리ㆍ범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어느새 편법과 반칙에 익숙해져 사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건전한 꿈과 희망을 잃고 있다.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취재진이 만난 청소년들은 최근 드러난 고위직들의 부정직한 실태를 보면서 분노하는 이들도 있지만, 좌절감 속에 냉소를 표출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J고교 앞에서 만난 임정현(17) 군은 "군대를 다녀오고 세금을 내는 건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인데 그런 것들조차 충실히 하지 않으면서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일침을 가했다. 임 군은 그러면서 고위직 인사들의 부정직이 사회적 불신을 조장한다고 지적했다. 임 군은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차 타고, 자녀들 해외로 유학 보내고 하는 거 아닌가"라며 "친구들 사이에서 '엄친아', '엄친딸' 같은 말 많이 쓰는데 그런 말에는 부러움과 함께 어딘가 모를 의심의 눈초리도 있다"라고 말했다. 또래들 사이에서마저 자연스럽게 서로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상대를 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김대석(17) 군도 생각이 비슷했다. 김 군은 "고위층에 올라가는 사람들 보면 참 뻔뻔한 것 같다. 자신을 둘러싼 문제제기나 의혹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계속 자리 지키려고 버티는 것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며 "더 안타까운 건 깨끗한 인물들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꼭 그렇지 않은 사람만 이름이 오른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김 군은 "청렴한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 건지, 있어도 안 뽑는 건지 모르겠다"며 "물론 도덕성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하나의 자격요건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백한 부정행위 발각 시에는 높은 자리에 올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수도권 S고 앞에서 만난 차상현(18)군은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비리 전력이나 부패 의혹이 나와도 결국 대통령이 장관에 임명하면 모든 게 끝나지 않냐"며 "결국 어른들이 가르쳐 준 정직함이나 청렴 등은 다 거짓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울 동대문구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김영선(가명ㆍ16)군도 "도덕성보다는 능력과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게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교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하면서 친구들도 '현실이 그런 거다'라며 체념하거나 냉소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이같은 아이들의 상황에 부모와 교사들은 걱정에 가득했다. 고3ㆍ고1 자녀를 둔 주부 최지선(43)씨는 "가장 우려스러운 건 자라나는 아이들이 왜곡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점"이라며 "각종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고도 사회지도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청렴한 삶이나 노력보다는 편법이 아이들의 사고를 지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한탄했다. 최 씨는 이어 "이미 고등학생만 되도 고위공직자들의 부도덕성에 혀를 내두르는 건 기본이고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며 "그만큼 이러한 현실에 학생들도 무뎌지고 익숙해졌다는 얘기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거를 개선하지 못하고 묵인하고 용인해 온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고1ㆍ중3 자녀를 둔 직장인 이경범(46)씨도 비슷한 경험을 한 후 걱정이 크다. 이 씨는 중학생 아들로부터 '다운계약서'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세금 적게 내려고 계약서를 거짓으로 작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긴 했지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이 씨는 "근본적으로 나랏일 하려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며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라고 걱정했다. 그는 "정공법을 몸에 익히기보다는 불법과 탈법, 부정 등으로 지름길을 찾으려 하는 인식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부모 잘 만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그런 부정 저지르고도 좋은 자리 꿰찰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겠나"라며 "계속해서 부정 의혹이 있는 후보자들이 나오기보다는 이들이 책임감 있게 사퇴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제도나 시스템에 의해 자연스럽게 후보군에 오르지 못하는 개선책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에게도 고위직들의 부정직함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큰 걱정거리다. 서울 J고 권우섭 교사는 "고위직의 부정직한 행태는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의 사고와 인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며 "우리나라 사람들 10명 중 7명 정도가 '우리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는데 아마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권 교사는 최근 동료 교사로부터 고위직의 부정직한 행태를 주제로 학생들과 토론을 했더니 '현실이 그렇지 않느냐',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니냐'는 등 현상 그대로를 받아들이려는 아이들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아이들보다 많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다. 권 교사는 "사고가 숙성돼 가는 과정에서 이런 방향성을 잃은 사고가 정착될 경우 나중에 이들이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서 생활할 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우려했다.
30년 가까이 교직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온 서울 근교 한 고교의 최 모 교감도 "사회 기득권층의 행태를 보고 기회에 있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거나 그로 인한 반항심, 다소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학생들도 있다"고 걱정했다. 최 교감은 "일종의 사회에 대한 체념이며 적개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심리적 허탈감, 우리 부모들은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처럼 느끼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며 "한편으로는 우리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분들이 성장하는 세대에 귀감이 되고 롤 모델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비겁한 모습만 보이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청소년 전문가들의 우려도 깊었다. 김영인 방송대 청소년교육과 교수는 "당연히 청소년들의 도덕성은 기성세대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며 고위직들의 부정직한 행태를 청소년들이 따라 배울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특히 청소년들은 성장 세대이다. 감수성이 성인들보다 더 예민하고 흡수력이 높다"며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특히 최근에는 매스 미디어가 발달해 기성세대들의 행태를 잘 모방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정지철 흥사단 투명사회본부 팀장도 "청소년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정직 지수가 낮아지고 있다"며 "사회가 물질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하면서 청소년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 팀장은 특히 "특정한 범죄, 파렴치 행위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제로 똘레랑스(무관용주의)'가 사회 전반적으로 지켜져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며 "대통령 측근이 사면된다거나 고위공직자가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언론에서 보도가 되면서 '정직하지 못한 행태를 보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커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다른나라와 비교해봐도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절도나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 행동을 많이 하는 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사소하고도 습관적인 거짓말을 더 많이 한다는 게 정 팀장의 분석이다.
김봉수 기자 b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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