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은 어떻게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됐을까?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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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11월 8일 개최되는 18차 당대회(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향후 중국의 10년을 이끌게 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習近平, 59)은 이 자리에서 후진타오(胡錦濤, 70)의 뒤를 이어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될 예정이며, 이후 내년 3월로 예정된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직으로 오를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시진핑은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리커창(李克强, 57)과 함께 중국 최고의 권력기관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입성하면서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후 시진핑은 국가주석 겸 총서기를 맡게 되고, 리커창은 국무원 총리를 맡게 될 전망이다. 홍콩 명경(明鏡)은 중국의 차기 정부 정치국 상무위원의 숫자가 7명으로 확정됐고 시진핑과 리커창 외에 장더장(張德江) 부총리, 왕치산(王岐山) 부총리, 류윈산(劉雲山) 중앙선전부장, 장가오리(張高麗) 톈진시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조직부장이 내정됐다고 보도했지만, 중국 당부의 공식적인 발표가 없는 이상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시진핑이 차기 중국을 이끌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이다. 시진핑은 어떻게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됐을까?

1) 풍부한 현장경험 = 문화혁명 당시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실각하면서 고초를 겪었던 시진핑은 14살의 나이에 샹산샤샹(上山下鄕)에 참가해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서 생산대 활동을 하며 8년간 생활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몰락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의 지구서기에 올라서기도 했다. 이후 집안이 정치적으로 복권된 뒤에도 그는 잠시 군부의 실력자 겅뱌오(耿?)의 비서가 되기도 했지만, 지방에서의 기층활동을 자원했다. 중앙의 고위직을 노렸던 다른 고위자제들과 전혀 다른 선택이다.

그의 이같은 기층 지원은 풍부한 현장경험이라는 과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허베이(河北)성을 비롯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상하이시 등지에서 약 25년간의 지방 생활을 해왔다. 당초 바깥에서는 리커창이 차기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리커창은 후진타오 주석과 같은 공청단 출신으로, 후진타오 주석과 각별한 사이인데다 일찍부터 5세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리커창을 제친 데에는 다른 여러 요인들이 있었지만 시진핑이 리커창에 비해 현장경험이 많았다는 점이 크게 어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리커창은 공청단에서 근무하면서 상대적으로 시진핑에 비해 기층에서 활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풍부한 실무 경험은 시진핑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중 하나가 됐다.

2) 태자당 = 시진핑은 어렸을 적부터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손꼽히는 고위층 자제이다. 시진핑의 아버지는 시중쉰(習仲勳)으로 중국 최고 지도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중국 공산당의 핵심 멤버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경으로 자연 어렸을 적부터 중국 최고위층 자제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들과 중국 최고 지도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이들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 공산당에서 시중쉰이 차지했던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치매(또는 다른 질환)를 앓고 있던 시중쉰이 1999년 중국 50주년 국경절 당시 참석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초대형 행사에 혹시 시중쉰이 문제를 일으킬지 모를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를 가로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방에서 휴양을 하던 시중쉰이 베이징을 찾자,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후진타오 국가 주석은 시중쉰이 거처하는 곳을 찾아 예방했으며, 과거 시중쉰 밑에서 일을 했던 원자바오(溫家寶)도 문안을 여쭸고,
과거 시중쉰과 같이 일했던 자칭린(賈慶林) 당시 베이징 서기도 그를 찾았다.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시중쉰에 대해 깊은 존경의 뜻을 갖고 있었으며, 상당수는 시중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시중쉰의 아들 시진핑은 공산당 최고 수뇌부들에게 있어서 ‘남’이 아니었다.

시진핑과 같은 중국에서 당·정·군 원로나 고위 간부의 자제를 일컫는 말로 태자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 내에서는 후진타오의 공청단, 장쩌민(江澤民)의 상하이방 등과 함께 주요 계파로 분리된다. 이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인물로는 태자당의 대부 쩡칭홍(曾慶紅)이 있다. 쩡칭홍은 중국 공산당 원로 쩡산(曾山)의 아들로 중국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석유방(국무원 석유부 또는 석유학원 출신의 권력집단)이며, 텐안먼 사태 이후 장쩌민을 위해 베이징을 근거지로 한 권력집단 베이징방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후에 장쩌민과 후진타오 사이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맡으며 중국 3세대와 4세대 지도부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사실상 중국 정계의 조정자 역할을 맡았던 그는 파벌간의 소통을 담당해왔다. 사실상 중국의 권력을 파벌간에 집단으로 분점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가 차지하는 역할은 더욱 크다.

2007년 68세를 맞은 쩡칭홍은 정치국 상무위원을 관두는 조건으로 시진핑을 상무위원에 밀어넣는다.(정치국 상무위원의 정년은 68세로 이 나이를 넘는 상무위원은 연임할 수 없다. 하지만 쩡칭홍은 딱 68세 나이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가 연임하겠다면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또한 후진타오 등도 그의 사임을 만류했었다.)

더욱이 리커창이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됐을 경우 공청단계가 2세대에 걸쳐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면서 계파간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응집력이 약한 파벌로 분류되는 태자장 출신의 시진핑이 최고지도부에 오르는 것은 계파간이 권력 분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3) 군 경험 = 시진핑은 청년 시절 겅뱌오의 비서를 맡으면서 군문에 발을 붙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군부 지도자가 육성되는 코스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군문에 발을 붙인 경험은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장점이 된다.

그는 지방관리로 있을 때에도 인근 부대에 각별한 관심에 애정을 기울였다. 2000년도 대만에서 독립여론이 강해지면서 전운이 깃들 당시 푸젠 성장이었던 대만과의 선의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군대를 옹호하는 성장의 모습을 드러내며 군부대 지원에 나섰고, 예비역 고사포 사단 건설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이외에도 자신이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의 일부를 군부대 위문 등에 배정했고, 수시로 군부대를 찾았다.

더욱이 그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은 유명가수이자 현역 군인으로 인민해방군 소장 계급을 달고 있으며 현재 인민해방군예술학원 총장을 맡고 있다. 시진핑은 인민해방군 소장가수를 아내로 둔 덕에 군내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4) 성격 = 시진핑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항상 가난한 서민들을 찾아다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에 관한 뉴스 보도의 상당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충을 듣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또한 그는 시중쉰이 한참 잘 나갈 때에도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는 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은 태자당이면서도 대중들에게 그에게 '평민'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는 이 외에도 당내 원로 등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은 것으로 유명하다. 상하이시 서기로 영전됐을 당시 시진핑은 상하이시 서기에게 주어진 3층 고급 주택을 보자마자, 원로들을 위한 양로원으로 이용하라고 말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온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그는 청렴한 관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 어느정도 속도를 내면서 중국 고위 관료들이 실각했을 당시에는 어김없이 대형 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왔는데, 시진핑은 중국 경제의 최전선 연안 지역에서 관료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부패 스캔들에서도 살아남았다. 그의 청렴함을 보여주는 한 사례를 소개하자면 그가 상하이시 서기를 맡은 뒤, 인수인계를 위해 이전 근무지였던 저장성에 갈일이 있었는데 상하이시는 그를 위해 특별열차를 준비했지만 그는 소형 버스를 타고 이동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시진핑은 성격이 온화하고, 남들과의 조화를 모색했다. 그는 존경하는 인물로 삼국지의 유비, 한고조 유방, 수호지의 송강을 들었는데 이들 모두 자신의 재주보다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인화단결 시키는 덕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보은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어려웠던 시절에 그에게 도움을 줬던 이들에 대해, 그는 자신이 힘이 되는 한 도왔으며 이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여러 방면으로 전달했다.

시진핑의 온건하고 타인의 의견을 잘 받아주는 성격은, 덩사오핑(鄧小平) 사후 카리스마적 지도자 대신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지도체제의 질서에도 잘 맞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모든 정파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아닐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을 가진 정파는 없다는 점이 주변 사람들과 화합하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는 모든 것에 있어서 정치가 우선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문화혁명 이후 급변하는 중국 정세와 정치 지도자들 사이의 생각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달라지는 점들을 능수능란하게 파악했다. 그는 상하이시 서기를 맡았을 때 공식적으로 한 첫 번째 일은 상하이 시에 있는 1차 당대회와 2차 당대회 개최지를 찾아 그곳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바라는 국정방향을 파악해, 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도 철저했다. 그는 각각의 시대마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이에 초점을 맞출 줄 아는 지도자였다.

시진핑은 홍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가 정치적으로 부상하면서부터 그는 언론과의 관계에 항상 신경을 썼으며, 언론에 자신이 등장하는 비율을 일정수준 이상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써왔다. 이 때문에 중국 언론은 그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들을 여러차례 내놓으면서 그의 성공을 도왔다.



나주석 기자 gongg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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