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자, 그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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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솔직히 말하겠다. 무식해 보일 수도 있다. '점령하라'의 저자를 처음 확인했을 때 얘기다.

이 책의 저자는 '시위자'다. 시위자라는 단어를 보고선 '중국인이 쓴 책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위자가 아니었다. 시위를 하는 사람을 뜻하는 시위자였다. 순간 부끄러웠다. '내가 이토록 시위에 관심이 없었나'라는 생각에서였다. 시위자로 한바탕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비우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점령하라'를 속죄하는 맘으로 읽어나가는 것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 참여한 60여명이 함께 쓴 이 책엔 시위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시위자들은 작은 내용 하나도 건너 띄는 법이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시위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시위자들은 그만큼이나 자세하게 쓰고 있다.

'점령하라'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의 본거지인 미국 뉴욕 주코티 공원 지도를 제일 먼저 보여준다. 지도엔 총회 장소와 도서관, 음식을 만드는 공간, 휴식 장소, 법률지원부스, 진료실, 안내데스크 등이 각각 어디에 있는지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머리말엔 시위자들이 어떤 생각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가 나온다. 이들은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로 시작한 이 시위가 미국 역사상 중요한 진보운동의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이라면서 "그 시위의 시작을 소개하려 한다"고 말한다.

'점령하라'엔 시위자들의 적나라한 생각과 그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유독 기억에 남는 부분은 주코티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인간 마이크'를 쓰는 내용과 시위자 일부가 경찰에 연행됐을 때의 일화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이 장면들은 감정을 동하게 한다.

2011년 9월17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시작된 날이자 정식 총회가 열린 날이다.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코티 공원에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있다보니 손확성기로 말을 전하는 게 어려웠다. 인간 마이크가 대안이었다. 인간 마이크는 연설자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 이들이 뒷사람에게 말을 전달하고, 뒷사람은 또 그 뒷사람에게 전하는 식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서 활동그룹 소속인 마리나 시트린(Marina Sitrin)은 "인간 마이크가 쓰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에너지와 기운이 넘치기 시작했다"면서 "정말 감동적이고 강렬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시위자들은 또 책에 이렇게도 썼다. '자신의 말이 둥그렇게 모인 시위대의 입으로 반복되고 공원을 둘러싼 은행 건물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것을 듣는 일은 분명히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경험이었다'라고.

브루클린 다리에서 시위 행진을 하던 사람들이 경찰에 끌려갔던 적도 있었다. 경찰은 다리 위 행진 대열에 있던 700여명을 교통방해죄로 연행했다. 이들이 뉴욕 경찰 본부에 도착했을 때, 한 경관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나도 여러분과 다를 것이 없다"면서 "압류와 잔인한 대출, 뒤틀린 은행 산업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고, 나 역시 여러분 편이지만 이 경찰 배지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다.

'점령하라'엔 이 외에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이끌어간 여러 모임들과 시위자들의 하루 일과, 시위에 함께 했던 학생들과 노동조합들, 언론에 비친 시위, 강제 퇴거 과정 등도 있다. 책은 '점령의 미래'를 논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러분의 자녀가 누릴 미래다. 자녀를 지키는 일이다. 점령 시위가 계속될 수 있도록 가족들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 거의 맨 마지막이다.

밤이 깊어서야 책을 덮었다. 마지막장을 읽고 난 뒤였다. 이제야 무색한 마음이 좀 사라진 듯하다.

경찰에 맞서 공원을 지켜내려 싸웠던 사람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사람들. 경찰에 여러 번 연행되면서도 끝까지 시위자로 남은 사람들. '점령하라'에서 만난 이 모든 사람들을 오래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잊어서는 안된다. 그게 '시위자'를 한눈에 못 알아본 죗값을 치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점령하라/ 시위자 씀/ 임명주 옮김/ 북돋움/ 1만3000원



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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