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물가와의 전쟁'에서 물러서나

물가냐, 경기냐. 한국 경제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 한쪽 발을 헛디디면 인플레이션의 나락에 빠지고, 다른 한쪽 발을 잘못 짚으면 살아나던 경기가 다시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 나라 안팎의 경제 환경이 그만큼 불안하고 불확실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제대로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정부의 대응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어서 걱정스럽다. 지금의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 내는지, 정책 방향은 바르게 잡고 있는지 의아스럽다.

어제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9월 최근경제동향(그린북)'은 하나의 사례다. 재정부는 '경제 여건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세계 경제의 하방위험과 금융시장의 변동성 확대를 그 이유로 들었다. '국내적으로 물가압력이 높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물가보다는 경기에 대한 우려가 훨씬 강하고 구체적이다. 한 달 전의 시각은 달랐다. 8월 그린북에서는 '경기 회복세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물가안정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적 대책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경제정책의 방점이 물가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물가안정에 놓은 것은 박재완 경제팀이 출범하면서부터다. 금리인상의 실기 등 그 전의 성장우선 정책에서 빚어진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슬그머니 물가에서 경기 쪽으로 정책의 중심축을 옮겨가는 모양새다. 변화는 얼마 전부터 감지됐다. 지난주 물가대책회의에서 박재완 재정부 장관은 "9월 이후 물가가 안정세로 돌아설 전망"이라 말했다. 8월 소비자물가가 5.3% 뛴 것을 놓고 이례적인 집중호우와 국제 원유가의 급등 탓으로 돌리는가 하면 기름값과 식품가격의 상승은 글로벌 현상이라고 물타기를 했다.

국내외 경제여건이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물가와의 전쟁에서 물러서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기업을 윽박지르는 식의 미봉책만으로 물가를 잡지 못한다. 정부는 기저효과로 물가상승세가 주춤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지만 근원물가나 인플레 기대심리를 감안하면 물가상승 압력은 여전하다. 추석상 차리기가 겁난다는 서민들의 목소리가 높다. 흔들리지 말고 물가를 향한 칼날을 다시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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