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DI 개막작 <북촌방향>, 우연과 필연에 관한 시간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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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은 국내 감독 중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동시에 가장 생산성이 높은 감독 겸 제작자다. 최근 매해 2편의 영화를 내놓고 있는 그는 지난해 <하하하>와 <옥희의 영화>를 각각 칸과 베니스의 공식 초청작 목록에 올려놓았고 올해 또 다시 2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최근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제) 촬영을 마친 홍상수 감독이 지난 5월 칸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한 <북촌방향>은 17일 개막한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개막식을 장식했다. 이날 국내 첫 공개된 홍상수 감독의 12번째 작품 <북촌방향>은 ‘반복과 변주’ 또는 ‘유사와 차이’라는 영화작가의 키워드가 영화 안팎에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전시한다.

<북촌방향>은 네 편의 인기 없는 영화를 만들었으나 현재는 대구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성준(유준상)이 서울 북촌에서 보낸 어느 겨울의 ‘밤과 낮’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무척 간단하면서도 매우 복잡하다. 간단히 줄이면 대강 이렇다. 선배 영호(김상중)를 만나러 서울에 온 성준은 옛 여자친구 경진(김보경)과 하룻밤을 보낸 뒤 영호, 영호의 후배인 여교수 보람(송선미), 성준의 영화에 출연할 뻔했던 전직 배우 중원(김의성)과 카페 ‘소설’에서 술을 마신다. 그는 ‘소설’의 주인이자 경진과 똑같이 생긴 예전(김보경)과 두 차례 키스하고 하룻밤을 보낸 뒤 헤어진다. 홍상수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반복과 변주’다. 그가 만든 12편의 영화는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반복과 변주를 실험한다. <옥희의 영화>를 기점으로 형식적인 측면의 반복과 변주는 더욱 두드러진다. 시간과 동일성의 개념이 기하학적 내러티브의 바탕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북촌방향>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교수와 여제자, 감독과 여자의 인물관계를 다시 가져온 이 영화는 성준이 북촌에서 배회하는 다섯 번의 낮 시간을 나열한다. 다섯 번의 낮으로 구획된 단락은 홍 감독의 이전 영화와 달리 소제목으로 구분되지 않고 곧바로 연결된다. 직선상으로는 다섯 번이지만 관객들은 시간의 미로 속에 빠져 같은 길을 다른 길처럼 돌고 돌다 제자리로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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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의 낮과 밤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유사하게 반복되지만 조금씩 다르게 진행된다. 예전과 경진은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느슨하게 연결된다. 성준과 일행들이 ‘소설’을 찾을 때마다 예전은 늘 자리를 비우다 뒤늦게 나타나 거의 똑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술을 마실 때마다 밖에 나와 담배를 피는 성준은 경진으로부터 문자를 받고 나서 뭔가를 사러 가는 예전을 따라가 키스한다.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날들은 연속적인 것과 반복적인 것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20분 만에 우연히 영화와 관련된 네 사람을 연속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보람의 말처럼 영호는 마지막 낮에 자신의 영화와 관련된 네 사람을 우연히 연속적으로 만난다. 성준이 보낸 시간은 하루인가 닷새인가? 성준의 이야기는 사실인가 소설인가?

<북촌방향>에서 시간과 동일성은 반복과 연속, 유사와 차이의 오차범위 안에서 수많은 ‘오해’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우연과 필연이 얽힌 조화(造化)의 개념이 끼어든다. 기묘한 우연의 연속이 실은 ‘조화’의 결과라는 이야기는 극중 성준의 일장연설로 직접 설명된다. 마지막 숏에서 성준이 놀라는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자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영화가 암시하는 그 어떤 것도 아닐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오해’처럼 겉모습만 보고 잘못 판단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홍상수 감독은 수많은 의미의 지점들을 모아 그 범위를 연결시켜 거대한 원을 만든다. 그 원 안에서 관객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셀 수 없이 많다. <북촌방향>은 가시적인 작은 세계를 통해 우리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단면을 추론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영화를 통해 단정짓는 모든 것이 ‘오해’라 해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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