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교장들의 수난시대라고 할 정도다. 존경받던 직책이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게 된 현실은 바로 겨가 묻은 교장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언제부터 교장실이 이권을 상담하는 밀실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소연도 못한 채 한데 묻혀서 매도당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다. 예로부터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했던 그 근엄한 훈장의 후신이 다름 아닌 교장이 아니던가.
수업중인 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경기도 안산) 교장실은 적막하다 못해 쓸쓸함이 감돌았다. 학기 초, 그 외로운 공간에서 한 가지 특이현상에 주목했던 교장. 개학 직후 실시한 모의고사의 평균성적이 방학 전에 비해 상당한 점수 차로 뒤쳐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전 학년의 모든 학급에 걸쳐 비슷한 현상이 나오자, 결론은 학생들의 방학생활습관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학 이후 성적부진, 깊은 고민 필수적인 기숙사생활에 방과 후 학습도 지도교사가 있기에, 우선 방학 기간의 공부습관을 개선하는 일이 시급했다. 개학 시마다 성적이 떨어진 채로 시작하는 문제가 해결되면 전반적인 학업성취도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전교생의 방학전후 성적분포도를 받아든 교장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회의와 숙고를 거듭했다. 제대로 된 처방은 올바른 진단의 산물이니만큼 교장실의 고독은 깊어만 간다. 안 해도 되는 문제를 만들어서 고심하는 배경에는 학교설립자인 이사장의 철학도 있었다. 개교 당시 교사를 신규 채용할 때, 상위그룹 학생들의 질문을 소화하지 못하는 수준의 교사부터 걸러냈던 것이다. 경력에 관계없이 고3생의 수능시험문제를 똑같이 풀어보게 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인데 그런 식의 테스트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싶다.
우려한대로 탈락한 선생들의 성적은 참담했다고 한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평균 50점도 안 되는 성적으로 신설학교 교사가 되겠다고 응모했던 그들의 학력수준에서 대한민국 교육현장의 부실을 알 수 있었다.
교장이 착안한 또 한 가지는 성적이 부진한 학생이 직접 선택하는 상담제도의 도입이다. 신상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는 학교마다 열려있으나, 거의 담임의 판단에 의한 개별호출로 시작되고 있다. 더구나 학습부진의 경우는 학생이 먼저 상담을 자청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학생에 되돌려준 상담선택권이따금 성적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들에겐, 성적부진은 일회성 번민차원이 아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심각한 문제인데도 말이다. ‘학생이 투신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한 번이라도 SOS를 칠 기회가 있었다면...’ 교장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적표가 나온 후 학생을 불러 분발을 질책하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대신, 자신의 문제를 인식한 당사자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결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그 채널을 어떤 식으로 상설할까 고심타가 ‘방과 후 학습장’ 출입문 옆에 한 장의 메모지를 붙여놓도록 했다. 학생이 학번과 이름을 적고 상담할 과목과 상담 받을 교사까지 기입하면, 지명된 선생님과 1대1 상담이 당일로 진행되는 시스템이었다.
두 과목을 적어도 되고 세 과목을 적어도 좋다. 고민이 해결될 때까지 몇 번을 신청해도 되며, 해당 교사에겐 학생이 만족할 때까지 끝장서비스를 할 책임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매일 몇 명씩 이름이 기재되었고 두 학기를 넘어서면서 제도로 정착되었다. 개인별 상담신청 횟수와 과목별 성적의 향상여부에 대한 상관관계를 분석해보면, 누적된 상담통계만으로도 새로운 개선책이 도출될 여지가 있다고 자신했다.
교장의 한 생각에 의해 개혁의 씨앗 한 톨이 발아되고 있다. 단지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어느 교장실의 고독이 거둔 수확이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