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정정은 불안하다. 얼마전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들은 조만간 다시 무장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90%를 장악했던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재탈환하기 위해 현정부군과 NATO연합군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한 NATO 연합국들은 계속해서 발생하는 인명피해 속에서 전쟁이 점차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pos="L";$title="";$txt="";$size="268,221,0";$no="2009090922484444497_2.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에도 한때나마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soud)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시절 소련군에게 무참한 패배를 안겼던 인물로,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던 괴뢰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새로이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가 되었던 탈레반에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던 인물이다. 9·11테러 이후 연합군과 함께 탈레반을 소탕했던 북부동맹이라는 조직도 사실상 그가 만든 조직이었다.마수드라는 인물을 알게된 것은 한 언론인의 책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간의 기록>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기자는 흔히 이야기하는 종군기자와 유사하다. 다만, 정문태 기자는 군을 따르는 기자(從軍)이기를 거부해 스스로를 종군기자가 아닌 전선기자나 전쟁기자로 불리기를 원했다. 아무튼 이 책에 나온 마수드라는 낯선 이름은 경외스러운 존재였다. 흡사 임진왜란 또는 조일전쟁 시절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979년 겨울, 소련은 본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순간부터 군복을 입은 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나타났다. 그해 12월 27일 현직 대통령이 암살되고 소련측이 내세운 바르라크 카르말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이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조국의 자유와 이슬람 신자로서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봉기가 일어났다.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판지셰르 계곡에서 동지들을 규합해서 소련에 맞섰다.
$pos="R";$title="";$txt="";$size="250,205,0";$no="2009090922484444497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전쟁 초기부터 마수드는 소련군의 눈에 가시였다. 소련과 수도 카불로 이어지는 보급로 역할을 했던 살랑도로 근처에 마수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불에서는 마수드의 보급로 차단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는 연료부족 사태를 맞이하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판지셰르 계곡 일대를 평정해야 했던 소련군은 1980년부터 1985년에 이르기까지 9차례의 대대적 공세를 펼쳤다. 1984년 소련군은 공중에서는 Mi-24공격용 헬기를 필두로, Su-25 폭격기를 동원해 계곡 곳곳을 군사시설과 주거지역 농경시설을 파괴했다. 지상에서는 T-62, T-55 탱크와 BMD, BMP 장갑차를 앞세운 소련군 최정예 공수부대 등으로 구성된 병력 2만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6천명이 대대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마수드는 소수의 게릴라부대를 매복해 소련군에 타격을 주도록 하도록 하고는 주력부대를 다른 쪽으로 이동시켜 소련군 기지를 공격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소련군, 그중에서도 최정예 부대가 동원된 9번의 전투의 결과는 소련군의 9전 9패였다. 즉, 마수드의 완승이었다. 소련군이 퇴각할 때마다 마수드는 빼앗은 무기로 더욱 무장했고, 소련군이 차지했던 요새들을 점령해나갔다.
참고로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을 본 사람은 이런 성과는 미국의 도움이 아닐까 싶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 나온 같이 미국이 스팅어 미사일을 본격적으로 제공한 때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본격적으로 침공한 1979년 후반보다는 한참 뒤다. 실제로 찰리 윌슨이 아프가니스탄의 대소 항쟁에 관심을 두고 원조 예산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이지만, 실질적으로 예산이 늘고 해당 예산 항목에서 대헬리콥터 공격무기 예산이 배정된 것은 1983년이다. 더욱이 일부 기록에 따르면 미국이 지원한 무기는 마수드의 정적이었던 헤크마티아르에게 대부분 갔고 마수드에게 전달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따라서 판지셰르의 승리의 원동력은 외부의 도움이 아닌 지형을 이용한 탁월한 전략, 헌신적인 병사들, 파키스탄 등지에서 무기를 구해 이를 분해해서 고원지대로 끌고 올랐갔던 수많은 짐꾼들, 판지셰르의 계곡에서 마수드와 그의 무자헤딘이라는 물고기들을 머물 수 있도록 호수 역할을 해줬던 주민들 그리고 이들을 한데 묶어낸 마수드라는 인물의 지도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마수드 자신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언제나 최전선에 자신이 사는 집을 마련하며, 전선이 움직일 때마다 함께 움직였다. 이런 마수드의 모습을 봤던 그의 병사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이런 그를 두고 소련군 사령관들이 ‘마수드가 살아 있는 한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절대 불가능하다“라고 말을 했을까?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저자 김정현은 <아프가니스탄 그 절망과 희망사이>에서 마수드는 단순한 전사만이 아니라 자신이 장악한 지역에 학교와 병원을 건립해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고, 여자 역시 배워야 한다며 학교는 남녀 공학으로 세웠다고 말한다. 실제 마수드는 이슬람 원리주의인 탈레반과 달리 내각에 여성을 포함시키려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외세로부터 조국을 해방하는 것 이외에도 여러 민족들이 함께 힘을 합해서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이슬람 국가를 준비했던 것이다.
마수드는 소련군이 퇴각하고 난 뒤에도 소련군이 제공하는 군수물자로 버텨내던 친소 정권마저 무너뜨리고, 수도를 탈환해 연합 정권을 구성한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은 다인종 국가이면서, 이슬람의 양대 분파가 함께 있는 나라다.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종족만 해도 마수드가 속한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투르크멘족, 하자라족, 키르기즈족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는 파쉬툰족이 있다. 종교 또한 대부분의 아랍 사람들이 믿고 탈레반 역시 신봉하는 수니파가 있지만, 이란 사람 대부분이 신봉하는 시아파 교도도 있다. 이렇듯 복잡한 구성은 각 종족과 종교, 정파,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이해관계를 달리하게 만들었으며, 각 민족·종교 별로 별도의 지원국가가 존재하는 기막힌 상황을 맞게 되었다. 따라서 각 세력은 별도의 군벌로 존재했고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의 분점과 같은 약속을 해야 만이 무력투쟁을 벌이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합정권은 서로 주도권 쟁탈에 빠져 제대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서지 못한 채 삐그덕거리기만 했다. 더욱이 머리에 천을 두르고 총 한 자루 둘러매고 조국 해방 전쟁에 나섰던 무자헤딘들 상당수는 통합된 규칙과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수도 카불을 장악한 뒤에도 내정은 혼란에 빠지고 군벌간의 충돌은 반복됐다.
그 사이 이전에 파키스탄은 그동안 미국과 함께 자신들이 군수물자와 자금 및 인력을 지원했던 이슬람 과격주의자 헤크마티아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신흥 세력인 탈레반을 지원한다. 파쉬툰 족에 근거 기반을 둔 이슬람 원리주의자 집단인 탈레반은 마치 혼돈의 해방자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진군했고, 마수드는 수도 카불에서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후퇴를 해서 이전에 자신이 대소 항전을 벌였던 판지셰르로 물러난다. 이후 탈레반의 학정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을 해방시키기 위해 군사활동을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마수드는 이후 군사적 반격과 함께 국제적인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9·11 테러가 있기 2일 전에 언론인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들이 마수드에게 인터뷰를 가장해 접근한다. 이들의 자살공격으로 마수드는 사망한다.
정문태 기자는 마수드에 대한 철저한 경호를 감안했을 때 내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는 암살방식이라는 점과 마수드가 최고 사령관으로 있었던 북부동맹 내부는 실상 서로간에 사생결단을 치뤘던 군벌 세력들이 반탈레반이라는 기치아래 모였던 허술한 조직이라는 점, ‘마수드의 죽음을 반기면서도 본인들이 살해하지 않았’다고 밝혔던 탈레반의 반응, 그리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졌던 반탈레반 전쟁 과정속에서 미국의 요구에 꼼짝없이 따랐고 탈레반에게 수도 카불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엄연히 자신들의 정부가 있음에도 미국에서 사실상 지명한 키르자이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이는 북부동맹의 태도 등에서 마수드 죽음의 배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반해 <판지셰르의 사자 마수드>를 쓴 다큐멘터리 감독 크리스토퍼 퐁피이는 마수드의 죽음과 관련해, 오랜시간 그를 지켜보면서 그가 행운 덕에 살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경호가 허술했다면서 그의 죽음을 9·11테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마수드의 죽음이 어느쪽인지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까닭에 알 수가 없다. 또한 너무 많은 이해관계에 둘러싸인 그의 죽음의 배경을 밝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배경 설명이 길었다. 요지는 이렇다.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대소 항쟁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 결과 ‘판지셰르의 사자’라는 별칭을 얻었고, 다민족·다종교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시(詩)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가까운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 이야기를 후련히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임에도 숫기없는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병사와 주민들에게는 언제나 친구처럼 아버지처럼 대했다. 본인은 정작 건축학을 공부했음에도, 인생의 대부분은 무장한 군대를 이끌며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좇은 인물이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모든 일을 그에게 의존해, 마수드는 신발을 달라는 사람의 청원부터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는 군벌들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은 직접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전투에 나서는 부대를 두고서 100명 단위 부대에게 지급될 기본 장비는 무었인지 어떻게 챙기야 하는지를 학교 선생님처럼 모아놓고 강의를 하는 최고사령관이었다. 그는 어쩌면 이런 과정에서 보다 더큰 인물로 성장할 수 가능성을 소진한 채, 다만 당면한 현실 속에 갖혀 보다 큰 구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론 이런 점이 마수드를 완전한 '성공'으로 이끌어 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pos="L";$title="";$txt="";$size="180,261,0";$no="2009090922484444497_3.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국내에 소개된 마수드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는 <판지셰르의 사자 마수드>가 가장 소상하게 인간 마수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인 퐁피이는 단순한 일회성 인터뷰가 아닌 프랑스와 아프가니스탄을 오가며 16년간을 만났던 이야기와 그가 봤던 아프가니스탄을 이 한 권의 책에 담아뒀다. 마수드에 대한 이 한 권의 책 속에는 조국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던 마수드와 그의 무자헤딘 이외에도 지도자 마수드에게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꿈꿨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기록이 담겨있다. 이를테면 마수드를 바로 옆에서 모시던 병사의 이야기나, 판지셰르 계곡의 주민의 모습, 마수드의 실제 모습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가 자기포장에 서툴렀던 이순신 장군의 기록이라면, <판지셰르의 사자 마수드>는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제3자의 기록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 싶다.
마수드가 죽은 다음해 키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그를 ‘국가 영웅’ 으로 추존했고, 그가 사망한 9월 9일은 ‘마수드의 날’로 정하고 국가 기념일로 만들었다. 지금도 탈레반이 통치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는 흔히 마수드의 초상을 만날 수 있으며, 심지어 국가 공식 행사에서 현직 대통령의 사진보다 더욱 큰 마수드의 사진이 걸리는 일이 있다고 한다. 미국 대사마저 완전한 부정선거라고 불렀던 이번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키르자이와 맞붙은 2위를 한(그리고 어쩌면 공정한 선거를 했다면 1위를 했을지도 모를) 압둘라 압둘라 전 외무장관은 마수드의 비서다.
9·11테러가 있기 꼭 2일전에 마수드는 암살됐다. 9·11테러라는 큰 사안 속에 그의 죽음은 크게 다뤄지지 않고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그가 암살되지 않았으면 아프가니스탄은 어땠을까? 또 9·11테러는 과연 일어났을까? 또 9·11테러 속에서 세계 경제를 구하기 위해 시도된 급격한 금리인하가 없었다면 또 오늘날 세계는 어땠을까? 무엇보다도 마수드가 살아 있었다면 어쩌면 아프가니스탄은 이제는 평화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연달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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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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