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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어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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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올해 구순인 어머니가 계신다. 2년 전 시어머니의 작고로 이제 유일하게 남은 부모세대가 됐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돈을 벌겠다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나를 떼어놓고 홀로 서울로 올라가셨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외벌이만으로 어렵다고 판단해 서울 이모네와 장사를 할 요량이었던 듯하다.

어머니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집으로 되돌아 온지 오래지 않아 서울로 진학한 언니를 좇아 나도 서울로 유학을 왔다. 중학에서 대학까지 십 년을 헤아리는 학창시절 동안 어머니가 드물게 서울집에 오시거나, 내가 방학에 짬을 내어 고향집에 들려 어머니와 함께한 것이 전부였다.


이런 어머니와 내가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은 정작 결혼한 다음이었다.


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자 직장 생활을 하는 딸을 위해, 그리고 금쪽같은 외손자를 위해 어머니는 당신의 돈벌이를 접고 온전한 가정주부가 되셨다. 집안 살림을 관장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썼다.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두 살 터울의 두 손주를 유모차에 싣고 유치원은 물론, 수영에, 발레에, 열심히 이곳저곳을 찾아 나섰다. 해외근무를 하게 된 남편 때문에 아이들이 어미 없이 외국생활을 해야만 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석 달에 한 번씩 비자를 갱신하러 한국을 들락거리며 '국제파출부'를 자임하였다.

전력으로 손주들을 키워내는 어머니 덕분에 나는 아이들의 모친 대신 '여자친구'로 전락(?)하긴 했지만 육아에 덜미를 잡히지 않고 직장에서의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내 장년시절의 어머니는 온갖 외풍을 막아주는 '난공불락의 온실'이었다.

아이들이 결혼해 떠나가고, 이제 우리 집엔 초로의 우리 부부와 어머니만 남았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염색을 하지 않으면 호호백발이 돼 버리는 나와 달리 아직도 검은 머리를 자랑하는 어머니이지만, 이젠 가끔 요일과 날짜도 헷갈린다. 미처 기억나지도 않은 내 친구의 옛일까지 뚜르르 꿰고 있어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면서도, 정작 방금 당신이 한 얘기를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우겨대기가 예사다.


이런 어머니의 '선택적 기억'의 결과는 '항상' 당신은 옳으며, 틀린 사람은(잘못한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이다. 사실 확인에 대한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온 나로서는 매 순간이 시비 거리가 될 지경이다. 그러니 내 노년시절의 어머니는 '인내해야 하는 존재'이다.


비쩍 마른 구순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슬프다. 척추측만으로 뒤틀린 모습도 슬프고, 형편없이 쪼그라든 작은 체구도 슬프다.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고난에도 결코 좌절하는 법이 없이,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거나 뒤돌아보지 않으며 앞을 향해 걸어가던 당당한 어머니의 자존감이 사라진 것이다. 서둘러 말을 바꾸고, 남의 탓을 하기에 바쁜 어머니의 변명을 듣기가 괴로운 것은 내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어머니를 더 이상 현실에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어머니의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십중팔구, TV 프로그램 덕이다. 처음에는 작게, 점차 흥이 나면서 크레센토를 그린다. 간혹 엇박자가 나긴 하지만 구성지고 간들어진 음색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어머니의 노래는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인내의 어려움을 잊게 하고 유년의 그리움으로 어머니를 되돌려 준다.


홍은희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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