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헌재서 비상계엄 당시 "아무일 없었다" 주장
비상계엄 당일 시민들이 군경에 맞서 민주주의 지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이 있었던 그날 밤을 두고 4일 헌법재판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은 여당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도 "의회 독재로 국정이 마비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 무거운 책임감으로 비상계엄 조치를 했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101쪽의 검찰 공소장에는 대통령 발언을 정면으로 부인할 내용이 가득 차 있다. 여전히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대한 막연한 기대, 양극화된 정치 현실에서 외눈박이가 된 진영 논리에 갇혀 그날 밤의 진실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한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짧은 기간, 계엄 선포에서 해제까지 이어졌고, 유혈사태 등의 참극은 피했으며, 이후 극적인 상황 전개 속에 당시 일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리고 두 달간 불면의 밤들이 이어졌다.
비상계엄은 그의 말처럼 경고성 계엄이었을까, 현실적 공포였을까. 비상계엄 소식을 듣고 달려와 국회를 지켰던 이들은 어땠을까.
그날 의원회관에서 야근 중이던 한 보좌진은 군용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착륙하려는 것을 알아챈 뒤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운동장에 서 있기라도 하면 설마 우리 군 헬기가 착륙하겠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제 무장한 군인들과 마주치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후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말 그대로 몸싸움을 벌여 최정예 특전사 대원들을 붙들었다. 어떻게 국회가 지켜졌냐는 질문에 "바깥에서 시민들이 군의 국회 진입을 막아준 덕"이라며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본청은 한방에 뚫렸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국회 바깥도 사실상 전쟁터였다. 국회를 에워싼 군과 경찰은 곳곳에서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당시 국회의사당 진입에 성공한 일부 국회의원들은 "비상계엄에 놀라 거리에 나왔던 시민들이 의원임을 눈치채자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의사당에 밀어 넣어줬다"고 술회했다. 일부 군부대는 시민들이 ‘나를 밟고 가라’며 군 차량을 막거나 병력과 장비를 실은 버스 밑으로 들어가 누워있는 통에 국회 진입을 못 했다.
악역을 맡아야 했던 군인들도 그날 ‘태업’으로 저항했다. ‘참수부대’라고 알려졌던 최정예 부대원들은 뛰지 않고 걸어 다녔고, 몸싸움에도 소극적이었다. 민간인, 더욱이 우리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군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반란군’이 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날 의사당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국회 측 직원, 보좌진과 군인들은 기묘한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일촉즉발 위기 속에서도 행여라도 군인들이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고, 서로 ‘더 밀지 말라’며 직접 충돌을 자제하기 위한 노력을 벌였다.
국회를 지키겠다고 나섰던 이들은 어느 순간 ‘최후’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제각각 사명감 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각자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해냈다. 그들의 용기와 헌신 덕에 그날 이 땅의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본 이상 대통령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마치 호수 위에 빠진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윤 대통령이야말로 그날 이후 부서진 나라를 직시해야 한다.
나주석 정치부 차장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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