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늘 사람이 붐비는 곳은 화장실이다. 고속도로 위에서 생리 현상이 급할 때 곤란한 일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제어하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 큰 불안감을 느끼는 게 사람 심리다. 당장 고민을 해소할 방법도 없다. 버스가 휴게소에 빨리 도달하길 바랄 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럴 때 나오는 참을 만하면 참아보라는 주변의 당부. 생리 현상과 관련한 사안에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몸이 아픈 데도 일단 참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이성적인 처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번 추석 연휴, 비이성적인 행위의 당사자가 될 처지에 놓였다.
이른바 ‘아프지 않을 결심’. 어떤 영화 제목을 연상하게 하는 그 결심은 한국 사회가 마주한 현실과 관련이 있다. 적어도 이번 추석 연휴 때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아픔을 참아야 한다는 무언의 다짐이 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추석 연휴에 의료 대란 사태가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이미 병원 응급실 문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어지간한 상태가 아니라면 응급실 이용은 기대하기 어렵다. 수용 인원을 초과하는 환자들이 밀려들다 보니 빚어진 현상이다.
추석 연휴 때 문을 닫는 병·의원이 늘어나고, 근무하는 의료 인력이 더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 관계 당국이 필수 의료인력 확보에 애를 쓴다지만 추석 연휴 기간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게다가 명절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이동하고 모이는 기간이라 돌발 상황도 많고 사건·사고 건수도 많다. 환자는 쌓여 가는데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려운 환경은 그 자체로 불안 요인이다.
만약 자기 가족이 갑자기 아프거나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간 응급실이 수용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다시 응급실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교통량 증가로 도로까지 정체된다면 피가 마르는 경험을 하지 않겠는가. 고통을 호소하는 가족을 어떻게 해주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참을 만하면 참아보라는 당부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질병의 경중(輕重)은 의사의 판단 영역이다. 그런데도 보건복지부 차관이라는 사람은 언론에 나와 "열이 많이 나거나 배가 갑자기 아프거나 이런 것들이 경증"이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자기 아이가 열이 많이 나거나 배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정도면 경증이니 응급실까지 갈 일은 아니라고 할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질병에 관한 비의료인 판단이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때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열과 경련을 호소하던 2살 아기가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한 상황에서 시민 불안을 괜한 걱정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불안 상황을 해소할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추석 덕담 대신에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를 주고받는 현실. 비이성적인 다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프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 서글플 뿐이다.
류정민 사회부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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