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이재명이 꺼내든 '계엄령 준비 의혹'
정부 수립 후 현재까지 계엄령 10번
최장 계엄령은 5·16군사정변 때…총 569일
2017년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서 공개되기도
군사 정권기를 마지막으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하지 않던 계엄령이 최근 여야 공방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야 당 대표 회담에서 '계엄령 준비 의혹'을 꺼내 들었고, 이를 친이재명계 의원들이 재언급하면서 파장이 더욱 커지는 모양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근거 없는 정치 공세를 멈추라고 반박한다.
헌법 제77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사상 필요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행정권과 사법권을 계엄사령관이 행사하게 되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도 일부 제한될 수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발동된 계엄령은 대부분 정권 유지를 위해 내려졌다. 총 10번의 계엄령이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 4번 ▲박정희 정권 당시 4번 ▲전두환 정권 1번 등이다. 이밖에 10·26 사태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로 지역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발동되기도 했다.
최초의 계엄령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 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두 번째 계엄령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 지역에 선포됐다. 두 계엄령 모두 1949년 11월 계엄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내려졌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불법 집행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6·25 전쟁 중이었던 1952년 5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며 부산·경남·전남 등 지역에 세 번째 비상계엄령(부산정치파동)을 선포한다. 직전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해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간선제하에선 재선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국회의 계엄령 취소 의결을 막기 위해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해 구금하기도 했다. 네 번째 계엄령은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발동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계엄을 4차례나 사용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 당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는데,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던 박 전 대통령은 재원 조달을 위해 한일 회담을 추진하고 나섰는데, 이를 반대하는 6·3항쟁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한일 회담을 '굴욕 회담', '매국 회담' 등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즉각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후엔 1972년 10월 집권 연장을 위해 유신헌법과 함께 계엄을 선포해 국회 해산을 시도했다.
8~10번째 계엄령은 사실상 지역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것으로, 연장선에 있다. 1979년 10월18일을 전후해 박정희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부산·마산 시민들의 시위(부마 민주항쟁)가 들불처럼 번지자 박 전 대통령은 해당 지역에 계엄령 및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계엄령은 10·26 사태와 12·12사태를 계기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어 1980년 5월17일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며 또다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저항하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기도 했다.
이후엔 1981년 국회법이 개정되면서 40여년간 계엄령이 없었다. 대통령 의사만으로 계엄을 즉각 선포할 수 없도록 국무회의 심의 절차가 규정된 것이다. 또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지체없이 국회에 통보해야 하는데, 이때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40여년간 계엄령이 없었다고는 해도 검토된 바 있다는 증거는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화 열기는 6·10 민주항쟁으로 폭발했는데, 이때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에 더해 미국이 계엄령 등 비상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면서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박근혜 정부 계엄령 검토설'은 당시 낭설에 불과하단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2016년 11월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돈다"고 운을 뗐는데, 이후 실제로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령부)가 만든 계엄령 검토 문건이 공개된 것이다. 당시 서울 광화문 등 광장에서는 시민들의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현재 민주당이 '계엄령 준비 의혹' 근거 중 하나로 내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1일 여야 당 대표 회담에서 "최근에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계엄 선포와 동시에 체포·구금하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완벽한 독재국가"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근거는 김용현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비롯해 방첩사령관, 777부대 사령관 등이 윤석열 대통령과 같은 충암고 출신이라는 점이다.
반면 대통령실은 "무책임한 선동을 멈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2일 대통령실은 브리핑을 통해 "국민들에게 국가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탄핵과 계엄을 일상화시키고 세뇌시키는 선동에 불과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근거조차 없는 계엄론으로 국정을 마비시키려는 야당의 계엄 농단, 국정농단에 맞서서 윤석열 정부는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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