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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전생을 현생으로 만든 점…마침표 아닌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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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
해묵은 관계에 마침표 같은 쉼표 찍어
피천득 '인연'보다 진취적이고 개혁적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은 24년 만에 재회한다. "와, 너다." "와, 어떡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르겠어." 어색한 기류는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서로 눈을 맞추고 옛정을 나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석에 쇠붙이가 들러붙듯 마음이 동했다. 갖가지 현실적 장벽에 부딪혀 달라붙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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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송 감독은 그렇게 단절된 시간을 최소화해 펼친다. 교묘한 편집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감정은 회전목마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해성과 나영은 그 순간들을 함께 하나하나 복기한다.


"너는 나를 왜 찾았어?" "그게 그렇게 궁금해? 한번 보고 싶었어. 잘 모르겠어. 왠지 네가 날 두고 확 가버려서 열 받았던 것 같아." (중략) "그냥 군대에서 네 생각이 나더라고." "그랬구나. 우리 그때 진짜 아기들이었잖아." "맞아. 12년 전에 (화상 채팅으로) 다시 만났을 때도 아기들이었지." "이제는 아기가 아니지."


두 사람은 이미 안다. 감격스러운 재회가 해묵은 관계의 마침표라는 것을. 남은 생을 후회 없이 전진하고자 의지를 발현한다. 그런 노력이 있어 '패스트 라이브즈'는 피천득(1910~2007)의 '인연'보다 진취적이고 개혁적이다. 피천득은 뾰족한 지붕에 뾰족 창문이 있던 집에서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꼬 얼굴을 보게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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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은 아쉬운 기억을 수필로 정리하고 가을 경치를 보러 소양강으로 떠났다. 적극적 형태의 '놓아 버림(letting go)'으로 미련을 끊었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많은 사람과 얕게 교류하기보다 소수의 친구를 깊게 사귀었다. 수필 '구원의 여상'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과거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생애의 일부분인 까닭입니다. (중략) 몇몇 사람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섬기지는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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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서술처럼 삶은 작은 요소들이 모여 이뤄진다. 하나같이 예고되지 않는다. 해성과 나영이 재회하는 날, 예보된 비가 내리지 않듯 불규칙의 연속이다. 그래서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만약'을 떠올린다.


해성과 나영은 그런 순환의 법칙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인연은 꼭 같은 시공간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거나 친분을 맺어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직접 만나지 못했어도 상대가 세상에 남겨놓은 글이나 업적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 또한 인연이다. 피천득도 생전 셰익스피어나 찰스 램, 아인슈타인 같은 이미 고인이 된 인물들과 맺은 인연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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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과 나영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다시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인연이다. 발걸음이 서로 반대를 향해도 단단하게 엮인 끈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전생은 현생이 되고, 이별은 새로운 인연을 기약한다.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서는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그때 우린 누굴까." "모르겠어." "나도. 그때 보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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