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내모는 신자유주의
일과 성과 통해서만 삶 자각
억지로 하지 않고 누리는 무위
게으름이나 무기력과는 달라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어느새’란 말이 선뜻 피부에 느껴진다. 마치 초겨울 바람 같다. 아리고 쓰라리다. 물론 하루하루 바삐 보내지 않은 적도 없고, 열심히 살지 않은 날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득 돌아보면 시간이 쌓이지 못한 채 스르르 흩어져 남김없이 사라진 기분이다. 인생 한 해를 빼앗긴 듯 그저 허망할 뿐이다.
열렬히, 정신없이 살았다고 해서 반드시 괜찮다고 할 수 없다. 뿌듯한 보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삶, 단단한 기억을 남기지 못하는 삶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생존으로, 벌거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나, 거기에만 집념할 때 삶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맹목으로, 공허로, 무로 전락한다.
‘관조하는 삶’(김영사)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노동과 행위에 중독된 현대인의 삶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더 바쁘게 일하고, 더 왕성히 성과를 올리며, 더 많이 소비할수록, 흔히 우리는 살아 있다고 느낀다. 일과 성과를 통해서만 삶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 근간엔 성과 향상을 위해서 무한 경쟁을 부추기고 다그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있다.
이 사회에선 "활동이 인간 실존을 남김없이 흡수"한다. 손에서 잠시라도 일이 떨어지면, 우리는 시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빠져 불안에 떤다. 그 탓에 "우리는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 이제 삶의 보람은 자기 계발적 성취로 변한다. 더 큰 역량을 길러, 더 많은 능력을 보유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쳐내는 게 자존의 증거가 된다. 일은 삶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삶이 일을 위해 있는 듯한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행위 강박과 성과 집착은 삶에서 안식을 빼앗는다. 노동과 생산에 속하지 않은 멈춤과 휴식은 인생 낭비처럼 느껴진다. 활동 없는 삶을 한순간도 견딜 수 없어서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염려"에 쫓기는 삶, "단지 삶일 뿐인 삶"은 인생이 아니라 고난에 불과하다. 노예만이 쉼 없이 일한다. 빈틈없는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삶은 야만에 지나지 않는다. 휴식 없는 삶을 사는 인간은 멈춤 없이 "작동하기만 하는 기계"나 다름없다.
행위의 쳇바퀴는 아무리 열심히 돌려도 우릴 좋은 삶으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거기엔 존재를 채워 주는 근원적 의미가 빠져 있다. 열심히 바쁘게 살아갈수록 마음이 헛헛한 이유다. 행위에 중독된 삶은 결국 우리 존재 자체를 소진시킨다. 우리에겐 다른 삶이 필요하다. 무위(無爲)의 삶이다.
무위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음’과 ‘억지로 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식함으로써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 또한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의도나 목적을 띤 활동에만 몰두하는 걸 멈출 수 있다. 따라서 "무위는 정신적 금식과 같다." 금식은 우리 미각을 되살려서 하찮은 음식에서조차 신비로운 풍미를 느끼게 한다. 마찬가지로 무위는 행위에 지친 삶에 그 생동성과 강렬함을 돌려준다. 그것은 성과 지향적 삶, 그 단조롭고 무미한 쳇바퀴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무위는 "활동의 공백", 게으름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다. 무위는 특정한 형태의 행위다. 장자는 무위를 요리사 포정(疱丁)의 칼질, 즉 억지로 힘들이지 않고 결대로 행하는 일,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는 일에 비유했다. 하이데거는 무위를 ‘놔두기’라고 불렀다. 이는 "불가능한 것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가능성을 활용하는 행위"이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걸 모조리 누린다는 뜻이다. 완벽한 자유이고 무한한 행복이다.
한병철은 무위야말로 "삶의 가장 강렬한 형태"라고 말한다. 침묵이 있어야 언어에 힘이 붙는 것처럼, 고요가 있어야 소리가 음악이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위하지 않는 활동, "목적과 효용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비로소 행위가 의미를 띤다. 무위 없는 행위는 맹목적 움직임일 뿐이다. 참된 행복은 목적과 효용을 좇는 활동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것, 에둘러 가는 것, 궤도를 벗어나는 것, 남아도는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는, 아름다운 몸짓들 덕분에 있다."
단편소설 ‘인형극에 대하여’에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한 춤꾼을 통해 무위와 행위의 관계를 역설한다. 이 작품에서 춤꾼은 동작을 의식하는 순간, 그 행위는 우아함을 상실한다. 목적이 앞에 나설 때 아름다움은 증발한다. 춤이 춤다움을 잃는다. 따라서 "명인은 연습을 통해 의지를 떨쳐낸다." 요리의 달인이 근육과 뼈의 결을 따라 소를 요리하듯, 진짜 춤꾼은 자연스레 손발을 놀려서 춤선을 우아하게 만든다. "행위는 무위에 이르러 완성된다."
삶이라고 다를 리 없다. 구약성서의 신은 엿새간 세계를 창조하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함으로써 세계를 완성했다. "쉼은 창조의 본질적 핵심이다. 안식일이 창조에 신적인 장엄함을 부여한다. 쉼이 없으면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잃는다." 아직 휴식에 이르지 못했을 때 우리 삶은 여전한 혼돈에 처해 있다. 무위의 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발견할 수 있다. "보기에 좋았더라."
무위는 또한 우리를 창조적으로 만든다. 행위는 이미 정해진 목적이나 효용에 따라서 똑같은 걸 반복할 뿐이다. 그 속에선 새로운 게 생겨날 수 없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듯, 아무 목적 없이, 맘 가는 대로 자연스레 여기저기 기웃댈 때, 이전엔 눈에 띄지 않았던 "다른 무언가, 있었던 적 없는 무언가"가 보인다. "무위는 우리를 삶의 비밀에 입문시킨다."
무위 속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관조라고 한다. 현대인은 관조를 버리고 행위에 몰두함으로써 내적 평화나 행복도 함께 빼앗겼다. 메난드로스는 노래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 세계의 장엄한 것을 담담히 살펴본 이라네. 빛나는 태양, 별들, 바다, 떠가는 구름, 불의 찬란함을." 관조가 없으면 삶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행위하는 삶은 꼭 관조하는 삶을 향해야 한다. 관조하는 삶은 "인간 삶 전체의 목표"로, "신적인 자족을, 완전한 행복을 약속"하는 까닭이다. 한 해를 돌아볼 시간이다. 무위의 시간 속에서 삶을 관조할 때가 되었다. 인생이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고, 존재가 행복의 뿌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말이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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