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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문화수다]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영웅 서사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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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문화수다]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영웅 서사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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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삼부작’ 두 번째 편 '한산: 용의 출현'에서 큰 감탄을 했던 까닭은 무엇보다 그 걸출한 연출 호흡 때문이었다.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건만, 결말부를 향해 내달리는 몰입(Flow)의 강도가 어찌나 강력한지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 주·조연만 30명에 달하거늘, 별다른 흐트러짐 없이 흔치 않은 내러티브 응집력을 발휘한 것은 영화 보기 오십 수년 구력의 필자에게도 일생일대의 영화 체험이었다.


두 번째 관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삼부작 첫 번째 이야기 '명량'(2014)과 김한민 영화 세계의 전환점 '최종병기 활'(2011) 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으나, 감독의 연출역량은 내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대작’을 넘어 ‘거작’의 아우라! 성격화, 연기, 음악효과 등 사운드 연출, 극적 호흡, 주제의식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최상의 수준을 일궈냈다”며 극찬했던 '명량'보다 한 수 위라고 여기는 것은 그래서다.

'한산'에 남다른 눈길을 보내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 300억원 전후의 제작비가 투하된 데다 개봉 20일째인 지난 15일 손익분기점인 600만 선을 넘은 대중적 상업 영화이건만, 소위 ‘영웅 서사’의 ‘해체’가 이뤄졌다고 판단돼서다. 주지하다시피 이순신은 세종대왕과 함께 대한민국 역사의 최대 영웅이다. 장르 불문 영웅을 극화하는 텍스트들은 해당 영웅의 영웅적 면모를 최대한 살려야 한다. 그 영웅의 인간적 면모에 방점을 찍더라도 영웅성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명량'이 그 최적 사례다. 이순신의 인간적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영웅적 위용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것. 최민식은 최상의 선택으로 다가섰다. 이 땅의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1760여 만의 역대 1위 흥행 수치가 그 증거다.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극화했다는 조철현 감독의 '나랏말싸미'(2019)가, 100만 선도 넘지 못한 결정적 연유는 세종대왕 영웅담이 아니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송강호 박해일 두 스타-배우가 주연을 맡았건만 말이다. 관객들이 알아 왔고 보고 싶은 세종대왕상이 아니었던 것. 한글 창제의 진짜 주역이 우리네 역사의 으뜸 영웅 세종대왕이 아니라 당시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는 신미 스님이었다니, 이 땅의 그 어느 관객이 그 논란 다분한 ‘사실’ 내지 ‘진실’을 확인하고 팠겠는가. 결국 영화는 영웅 서사의 해체를 시도했던 것인데,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던 셈이다.


그때로부터 3년여의 세월이 흐른 이 시점, 상황은 적잖이 변했다. 대중 관객들은 여전히 영웅 서사를 선호하고 매달리기 마련이거늘, 그런데도 '한산'은 600만 선을 넘어 700만을 향해 가고 있다. 고작 12일 만에 1000만 고지를 돌파한 '명량'에서 비교될 수 없는 기세지만, 1272만의 '알라딘'(2019)의 30일보다 빠르며 1232만의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동일한 속도란다. '한산'의 영웅 서사 해체에 새삼 특별한 주목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감독이 지장과 용장으로 그 차이를 역설했듯, '한산'에서의 이순신은 '명량'에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박해일의 이순신 해석은 최민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다. 명령을 내릴 때도 차분히 부관을 통해 전달한다. 표정도 매한가지다. 떨릴 때조차도 내적으로 표현되지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박해일의 연기는 그만큼 섬세하다. 박찬욱에게 올 칸이 감독상을 안긴 '헤어질 결심'의 ‘품위’ 가득한 형사 캐릭터 해준 못잖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진 않아도, 그래서인지 박해일의 연기 임팩트가 약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더러는 이순신이 아니라 변요한이 분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아니냐는, 별 설득력 없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이 영웅 서사가 해제된 결과라는 게 내 해석이다.


'한산'은 세계 주류 영화의 왕국으로 군림해온 미국 할리우드의 그렇고 그런 영웅물과는 다른, 유의미한 도전으로 차별성·개성은 물론이고 흥행과 비평적 호응에 이르기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다. '한산'의 영웅 서사 해체는 몇 해 전부터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켜온 ‘한류’에도 직결된다. K-팝의 BTS와 블랙핑크를 비롯해 칸과 아카데미의 동시 정상 등극으로 세계영화사의 흐름을 뒤바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과, 넷플릭스 사상 최대 실적으로 올린 황동혁 감독의 OTT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 등 K-콘텐츠가 한결같이 내세운 공생·상생의 세계관·가치관을 인상적으로 체현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영화제 및 영화상에서의 성과들이다.


영웅 서사의 해체는 '비상선언'에서도 발견된다. '우아한 세계'(2007), '관상'(2013), '더 킹'(2017)의 명장 한재림 감독이 연출한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항공 재난 드라마. 송강호와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김소진 등이 열연한 캐릭터들은 분명히 영웅적 인물들이나, 그들 중 그 누구도 특별한 영웅으로 부각·비상되지 않는다. 재난 시퀀스들에서 '탑건: 매버릭'(2022) 못잖은 스펙터클을 뽐내는 영화는 그 지점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체슬리 ‘설리’ 설렌버거 단 한 사람을 영웅화시킨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2016)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는다. 200만도 안 되는 상대적 흥행 부진에도 '비상선언'은 '한산'과 나란히 주목해야 할 문제작으로 손색없다(는 것이 내 최종 평가다).


대중적 흥행 성적을 넘어, 영웅 서사의 해체는 최근 일련의 우리 영화들에서 감지된다.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도 예외가 아니다. 영화 속 그 어떤 중심 캐릭터도 예의 영웅적 인물들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시도와 무관하게 비치는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감독한 한국영화 '브로커' 등에서도 그런 징후들이 엿보인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웅 서사의 해체는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으로 진단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길고 깊은 관찰· 연구가 요청되긴 해도…….


전찬일(영화평론가/ ㈜한류역사문화TV 대기자·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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