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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생활] 위는 범인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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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생활] 위는 범인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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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胃·stomach)는 소화 기관이다. 위는 입에서 식도를 거쳐 보내어진 음식물을 소화하는 부분이다. 위 운동과 소화액이 포함된 위액을 분비해 음식물을 잘게 부수어 소화의 기능을 한다. 일반적으로 ‘속이 쓰리다’ 또는 ‘더부룩하다’고 할 때 병원에 가서 위내시경을 검사하게 되면 위 점막에 염증이 있는지, 아니면 점막이 깊게 파여 손상된 궤양이 있는지, 혹은 종양이 있는지를 관찰해 진단받게 된다. 법의학자도 위장의 점막을 마치 내시경을 하는 소화기 내과 의사와 같이 자세하게 살펴보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내시경으로 내과 의사가 보는 위는 비어 있지만, 부검에서는 위 내용물을 살피고 냄새를 맡아 보고 무엇을 먹었는지 취식 검사를 하며 위 점막을 함께 살피는 작업으로 내시경 검사보다 시간이 더 소요된다.


1990년대 중반 9시가 되지 않은 아침에 서울 북부 지역 아파트에서 흰 연기가 발생했다. 10여분만에 아파트 경비원은 불이 난 것을 목격하고 119에 신고했고 10분만에 도착한 소방관들은 화재를 진화했다. 화재는 안방의 장에서 시작됐다. 소방관들은 집 내부를 살펴보던 중 성인 여성과 그의 딸로 추정되는 2세 여자아이가 화장실 욕탕에서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에게서 끈으로 목이 졸린 흔적이 발견됐으며, 욕조의 물에 잠겨 있었다. 명백한 타살이며, 화재는 증거를 숨기려는 방화임이 틀림없었다.

용의자로 남편이 지목됐다. 남편은 의사였다. 남편은 오전 7시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내와 딸은 살아 있었다고 증언했고, 병원에 도착한 시각인 오전 8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확인됐다. 당시 사망자들이 물속에 잠겨 있는 상태였고 경찰이 시체가 놓였던 욕탕 내 물의 온도를 측정하지 않아 체온, 시강 및 시반의 사망시각 결정은 어려웠다. 결국 소화 능력을 근거로 사망시각을 추정하기 위해 위 내용물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이 시행됐다.


사망한 여성의 위에서는 일부만 소화된 흔적이 있었다. 약 1공기 정도 양의 흰밥과 함께 사망 전일 저녁에 먹은 미역국의 미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편은 아침에는 콩나물국을 먹었다고 했는데 여성의 위에는 콩나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필자의 스승과 박종철 사건의 시신을 부검했던 고려대 교수는 여성의 사망이 사망 전일 자정 무렵에서 사망 당일 새벽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남편의 변호인 측에서 섭외한 스위스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허(Thomas Krompecher)는 사람에 따라 소화의 정도는 다양하며, 위 내용물이 소화됐는지는 부검에서 맨눈으로 확인해서는 정확하지 않으며 일부 사망 후에도 소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어 위 내용물을 가지고 사망시각을 추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우리 법원은 1심 사형, 항소심 무죄에서 대법원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으로 고심 끝에 최종 항소심에서 무죄로 판정했다. 물론 수많은 다른 쟁점들이 얽히고설킨 양상이었지만 위 내용물의 법의학적 증거 여부가 부정된 사례였다.

서울의 서남부 지역에서 여성과 아들이 주거지 내에서 칼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에서는 조금은 다른 판결이 확정됐다. 당시에도 용의자는 남편이었다. 남편이 방문한 시각에 살해가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사망시각을 특정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위 내용물을 통한 감정이 불가피했다. 여성과 4세 아들 위 내부에선 나누어 먹은 양파, 채소, 견과류, 토마토가 발견됐다. 위 내용물 소화 정도가 일치했다.


당시 변호인과 검사의 질문에 모두 일반적으로 사람은 음식물을 삼킨 후 10분 후부터 위장운동이 시작되며 가벼운 식사는 2시간 이내, 중등도 양의 식사는 3~4시간, 과식할 경우에는 4~6시간 이후에 위가 비게 되는 시간(gastric emptying time)임을 이야기했다. 다만 이번에는 사망한 두 사람의 위 내용물 모두에서 소화되지 않은 고형물, 즉 토마토로 추정되는 내용물이 확인된 것을 근거로 식사 후 4시간 이전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라고 진술했다. 이는 남편이 방문한 시각에 사망했다는 근거로 판단됐다. 물론 다른 쟁점들도 고려되며 2심 유죄를 거쳐 최종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12월 추운 겨울 한밤에 아파트 CCTV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비틀거렸다. 대리운전을 통해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 잠시 대리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허우적거리며 카메라 사각지대로 사라졌다. 그가 발견된 것은 다음 날 주차장 한구석이었다. 번듯한 기업의 중간 관리직으로 승진한 축하를 겸해 친구들과 즐거운 술자리가 있었다.


밤 12시경 아내에게 대리기사를 불러 간다는 통화를 했지만, 깜빡 잠들었던 아내는 남편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내는 주차장으로 가 주변을 헤매다 주차 기둥 뒤에 앉아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남편은 턱에 피부가 까지는 상처를 입고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황급히 흔들어 깨우며 119에 신고했으나 도착한 구급대원은 남편의 사망을 확인했다. 경찰은 최초 CCTV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정황과 턱 상처를 근거로 범죄의 가능성을 추정했다.


부검대에 오른 그의 시신은 선홍색이었다. 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견이지만 시신 내부를 확인했다. 위 점막에서 알코올이 섞인 시큼한 위 내용물이 확인됐고(추후 혈중알코올 농도는 0.155%였다) 이를 걷어 내고 나니 저체온사, 즉 동사에서 보이는 표범 무늬와 같이 얼룩덜룩한 점막출혈(Wischnewski Spots)이 관찰됐다. 턱의 상처는 넘어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됐고 사망과는 무관한 정도였다. 현미경으로 관찰한 위 점막의 출혈은 동사에서 관찰되는 전형적인 형태였다. 부검을 마친 후 유가족분에게 저체온사 사망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이 밖에 청산가리 중독, 소금 중독 사건 등 위 내용물을 보고 냄새를 맡고 무엇을 먹었는지 현미경으로 확인하고 위 점막을 관찰해 조직을 분석, 진실을 찾은 사례는 법의학자의 일상이다. 위라는 장기 하나에도 법의학자에게 시사하는 많은 ‘sign(징후)’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다만 아직 법정에서 위 내용물을 근거로 사망시각 추정은 앞서 언급한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법정에서 확신을 주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필자는 서울대병원 소화기 내과와 함께 위 내용물의 시간에 따른 한국인의 소화 정도를 연구하고 있다. 즉 외국 논문은 대부분 서구권에서 작성돼 그들의 식사를 기반으로 진행됐으나 한국인의 식사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를 하겠다고 신청서를 내면 대개 연구비가 지급될 가능성이 낮아짐에도 이를 함께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는 김상균 교수님께 지면을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유성호 법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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