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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시나리오엔 없던 그녀의 소시오패스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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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가득 눈빛·양같은 미소…영화 '콜' 전종서
천역덕스러운 얼굴로 살인마 연기…가해자로 변하는 과정 섬세하게 담아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도 게임으로 보고 즐기는 캐릭터"
대사와 지문 한층 구체화해 연기…화면 구성에도 영향 미쳐

[라임라이트]시나리오엔 없던 그녀의 소시오패스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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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에서 배우 전종서는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살인마 오영숙을 연기한다. 전형적인 광기와 격정의 병합이 아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담겨 있다. 괴이쩍은 웃음소리까지 의미가 부여돼 풍성한 볼거리로 나타난다.


오영숙은 불운한 여성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경계성 성격장애로 어린 시절을 정신병원에서 보낸다. 퇴원한 뒤에도 전남 보성의 외딴 저택에 사실상 감금된다. 신엄마(이엘)에게 학대에 가까운 퇴마의식을 받는다. 그는 한 통의 전화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는다. 20년 뒤 자기 집에서 사는 김서연(박신혜)으로부터 자신의 위태로운 앞날을 전해 듣는다.

러닝타임의 절반을 차지하는 살인하기 전의 얼굴은 선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혼잣말로 신엄마를 욕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김서연에게 친절을 베푼다. 20년 전 가스폭발 사고로 사망한 아버지(박호산)까지 구해주겠다고 한다. 전종서는 단순히 유대감을 쌓는 과정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반사회적 행동의 전주로 표현했다. 시나리오에 명시되지 않은 연기다.


(점프하여 침대로 앉는 영숙,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내가 말이야, 재밌는 생각이 하나 났거든? 너희 아빠를, 다시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영숙의 이야기를 들은 서연. 떨리던 입술이 꼭 다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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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서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전화 수화기를 든 채 침대에 누워버린다. 천장을 응시하며 익살스럽게 웃다가 오른쪽 눈을 슬며시 희번덕거린다. 치밀한 성격과 비이성적 광기를 동시에 암시하는 대목이다. 오영숙은 소시오패스(sociopath)다. 감정 조절에 능숙하고 타인의 감정도 잘 이용한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때까지 순한 양처럼 선한 미소를 보인다.

전종서는 "누군가의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를 일종의 게임으로 보고 즐기는 캐릭터"라고 밝혔다. "비정상적인 사고가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나타나길 바랐다. 그것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성과 어우러지면 초반부터 극의 긴장과 불안을 높일 수 있겠다고 봤다."


섬세한 연기는 오영숙이 자기를 죽이려 드는 신엄마와 맞닥뜨린 뒤 나누는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시나리오에는 구체적인 지문이 명시되지 않았다.


(의자를 끌고 와 신엄마를 보고 앉는 영숙. 앞으로 소화기를 내려놓는다. 얼어 있는 신엄마) "왜 그런 거야?" (몹시 당황한 신엄마의 표정. 각 잡혔던 의식 복장이 헝클어진 채 벌벌 떨며 입을 뗀다) "네 앞날에 줄초상이 날 거야.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 "푸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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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서는 대사와 지문을 한층 구체화해 연기한다. 오영숙은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신엄마에게 다가간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왜 그런 거야?"라고 묻는다. 어떤 말도 돌아오지 않자 "왜 죽였냐고?"라고 버럭 소리 지른다. 신엄마가 "네 앞날에 줄초상이 날 거야"라고 답하자 그는 실성한 듯 허리를 숙이고는 웃어댄다. 이내 정색하고 일어나 소화기가 있는 벽장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전종서는 시나리오와 달리 신엄마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곤 살인 도구를 찾는다. 이를 통해 일말의 희망을 잃었다는 슬픔과 배신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오영숙이 끔찍한 범죄를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도 각인시킨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애써 참아왔다고 암시한다. 그는 "오영숙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럽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가 정적으로 쓰여 많은 연구가 필요했다. 오영숙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아이다. 신엄마 정도는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꾹 참아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의 애틋한 마음으로 봤다. 언젠가는 따뜻하게 품어줄 거라고 기대했을 것 같더라. 그런 마음이 무참히 깨져버리면 누구라도 헛웃음을 칠 수 있다. 오영숙 같은 사람이라면 폭력성까지 분출할 테고. 그래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악동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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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서의 세밀한 연기 분석은 화면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엄마 앞에서 실성한 듯 허리까지 숙이며 웃어대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카메라는 전종서의 뒤에서 다리 사이로 내려오는 얼굴, 앞에서 채찍질 자국이 선명한 어깨를 조명한다. 각각 오영숙의 기괴한 면과 깊은 상처를 부각한다. 이충현 감독은 "전종서가 만들어낸 샷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촬영 직전 리허설에서 기력이 쇠한 사람처럼 허리를 숙이고 웃어대더라. 시나리오에 명시되지 않은 동작인데 기묘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바로 조영직 촬영감독과 어떻게 담으면 좋을지 논의했다. 이렇게 전종서의 배역 해석에 맞춰 계획을 수정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배역을 합리화할 줄 아는 배우다. 몰입도도 상당하다. 막 연기를 마치고 자기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배역에 쉽게 탐닉하는 습관은 때로 고통을 동반한다. 전종서는 오영숙의 격한 감정을 연기하고 한동안 앓아누웠다. 그는 "물을 끓인 주전자의 열기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촬영장에서 격한 감정을 분출할 때마다 온몸에 열이 났다.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였다. 이 또한 배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지금의 내 얼굴을 영화에 의미 있게 담고 싶다. 그게 영화를 하는 이유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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