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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초지진의 소나무

최종수정 2020.11.24 11:24 기사입력 2020.11.2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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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진 유적지에 서있는 소나무의 모습. 운요호 사건 당시 포격 상흔이 남아있다고 알려져있다.[이미지출처= 강화군 홈페이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진 유적지에 서있는 소나무의 모습. 운요호 사건 당시 포격 상흔이 남아있다고 알려져있다.[이미지출처= 강화군 홈페이지]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1875년 일본이 조선의 개항을 목적으로 군함인 운요호를 파견해 무력 도발을 일으켰던 강화도 초지진 앞에는 당시 포탄을 맞아 생긴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소나무가 아직 서 있다. 초지진은 당시 피해로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사라졌고 현재 남은 유적지는 1973년 남은 성벽들을 겨우 추슬러 작은 돈대 하나만 복원한 것이다. 실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은 이 소나무에만 남아있다.


초지진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벌어지기에 앞서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까지 연이어 외적의 침입을 당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장병들은 열악한 무기를 들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용감히 싸워 전사했다. 운요호 사건 당시에는 35명의 조선군이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병사들이 희생됐지만 조정이 강인한 의지로 외세의 요구를 거절할 것이고, 일본도 결국 포기하고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희생의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개항조약으로 알려진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조선 조정과 일본은 이 조약을 조일수호조규라 부르며 화친조약으로 일단락지었다. 자국의 병사가 35명이나 죽었는데 조정이 일본과 화친을 의결하자 전국에서 이를 항의하는 상소문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적의 포탄에 병사들이 죽었는데 그 상대국과 화친을 맺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항의였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두려워서 체결됐다고 둘러댔지만, 일본은 당시 이제 막 메이지유신 당시 막부와의 내전을 끝마친 상태로 아직 외국과 전쟁을 치를 만한 능력이 거의 없었다. 250t 규모의 소형 선박인 운요호는 당시 일본군이 운용 가능한 거의 유일한 함선이었다. 조선이 병인양요 때 싸웠던 프랑스 함선과 신미양요 때 쳐들어온 미국 함선은 모두 4000t이 넘는 대형 군함이었음을 감안하면 군사적 위협 때문에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은 핑계에 가까웠다.


일본의 현실적 군사위협보다는 조선 내 정치상황이 개국을 이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고종은 대원군의 10년 집권의 주요 명분으로 작용했던 쇄국정책을 타파하고자 했다.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로 집권한 외척인 민씨 척족들이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던 이유도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책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대원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러한 조정의 정치적 의도와는 관계없이 민중들은 자신의 아들을 차출해 병사로 희생시키면서도 적과 화친한 조정을 위해 더는 목숨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광복 이전까지 초지진이 복원되지 못하고 소나무만 덩그러니 놓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중들이 더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마음이 사라진 나라가 멸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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