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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승설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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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청명일, 예술가들과 예술을 아끼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 가서 직접 되찾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그림을 즉석에서 부탁한 사람은 소설가인 상허 이태준이다. 그곳에는 두 명의 젊은 화가 심원 조중현과 수화 김환기가 있었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면서 수장가인 토선 함석태도 함께 했다. 문인과 컬렉터, 화가들을 불러 모은 집주인은 당시 종로에서 백양당 출판사를 운영하던 인곡 배정국이다. 그는 양복점도 함께 운영했고 도자기를 수집하기도 했으며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마도 이념을 초월한 진정한 예술 애호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날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시인 한용운과 화가이자 수필가이며 미술사가인 근원 김용준도 인곡과의 관계가 돈독했다. 그 밖에도 구보 박태원, 길진섭 등 문인과 화가들이 이곳에서 회동했다고 하니 실로 근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이곳에 모여 무엇을 했고 어떤 생각을 나누었을까.


소전이 담아낸 화폭 속에는 사색할 수 있는 여백이 있다. 흙담과 정갈하게 손질된 나무들, 괴석이 놓여있는 정원은 한없이 고즈넉하다. 조금 더 바라보고 있자면 너른 바위가 펼쳐지고 돌을 파낸 곳에서 깨끗한 물이 솟아오른다. 소나무와 벽오동나무로 둘러싸인 사랑채에는 수십만 권의 책들로 가득 차있다. 곧 예인들이 모여 시를 읊고 휘호를 한다.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고결한 지성이 모여든 이곳의 이름은 '승설암'이다.

승설암의 예술가 모임은 한국 근현대기의 멋과 풍류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내재된 격조와 아취는 그림 안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화폭 뒤에 숨겨진 현실은 정작 어떠했는가. 예술가들은 식민지 치하의 어둠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수많은 예술혼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끝에서 부유했다. 삶과 죽음은 너무도 가까웠다. 그들은 다만 초연했던 것이다.


이들의 예술적 삶은 그 이후 각기 다른 운명이 이끌었다. 전쟁 중에 국보를 지켜내고 예술 활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널리 전파하기도 했다. 월북해 숙청을 당하거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고국을 그리워하다가 타지에서 가난 속에 눈을 감기도 했다. 서정성 짙은 독보적 소설과 한국미를 담은 최고의 추상화는 고단한 삶이 지나간 후에야 역사가 되었다. 결국 승설암의 예술가들은 암울한 때에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시대적 초상으로 남았다.


몇 해 전 소전 손재형 전시를 기획했다. '승설암도'를 수소문해 찾아냈고 전시 내내 소전을 비롯한 우리 예술가들을 자랑스럽게 알렸다. 유럽에서 온 큐레이터들은 왜 이처럼 훌륭한 작품들을 널리 소개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문득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보물전'을 찾은 앙드레 말로가 우리 문화에 존경을 표하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는 혜곡 최순우의 회상이 떠올랐다.

우리는 오랜 역사와 함께 독창적인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다. 다만 치유하기에 너무도 아픈 근대사를 겪으면서 문화와 예술로 향하는 지름길을 잠시 잃어 버렸다. 제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잊고 있었던 문화적 자긍심을 되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들을 이기려는 마음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다. 본연의 모습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승설암의 단상이 주는 울림이다.

승설암은 지금의 서울 성북동 중턱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그 터에는 현재 음식점이 들어섰다. 어떤 가시적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작품과 전시를 통해 그곳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 고결함이 기개와 함께 되살아나는 듯하다. 승설암은 삶과 예술에 있어 우리가 초월해야 하는 것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머지않아 '백색의 차가운 눈보다 나아지고자 했던 깊은 명상의 집'을 다시 지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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