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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참회의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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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 중 일상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말들이 있다. 막다른 데 이르러 어쩔 수 없을 때 사용되는 '이판사판'이라는 말도 그중 하나다. '이판'과 '사판'이 합성된 이 말의 연원은 '화엄경'으로, 화엄경은 세계를 이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이판은 근본 원리의 세계에 대한 판단을, 사판은 현실세계에 대한 판단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가 쇠퇴하면서 참선, 강학 등에 전념하는 수행승을 이판이라고 부르고 주지, 원주 등 사찰 운영을 맡은 스님들을 사판이라고 불렀는데, 고고한 수행승의 이미지로 미화된 이판에 비해 사판은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는 승려라는 비속한 뉘앙스가 덧붙여져 있었다. 최근 불교계의 상황을 본다면 이판과 사판의 차이도 많이 희석되어 별 의미가 없게 되었지만 이러한 차별이 과연 이론과 실천, 내적 수행과 현실적 실천에 대한 오해를 더하게 한 것이 아니었나 의심스럽다.

'이(理)'와 '사(事)'는 그밖에도 다양한 용례를 갖고 있는데, 참회의 두 가지 방법을 일컫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도 그중 하나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구원을 약속한다. 죄를 범한 사람도, 고통을 짊어진 사람도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으로 참회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영화 '밀양'에서 보여주듯이 탈종교화시대에 종교적 구원에 대한 기대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여주인공 전도연이 울부짖으며 내뱉은 "내가 먼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맘대로 먼저 용서를 해요?"라는 말은 사실 "종교적 참회 또는 회심을 통해 죄가 사라질 수 있는가?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종교적 주제들이다. 하지만 종교적 진실 속에서 일어나는 참회와 용서가 현실세계에 남아 있는 고통과 처벌과 부딪치며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에 종교적 진실은 내적 도피로 여겨졌으며, 더 나아가 종교가 앞장서서 '신의 구원'을 빌미로 죄진 자들을 용서가 아닌 용인하고 죄를 은폐해온 역사를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그 진실이 현실적인 의미를 담지 못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종교적 진실이 내적이고 주관적인 것일망정 하나의 진실이라면 그 차원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일 것이다.

화엄경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양립할 수 없지만 양립하고 있는 두 차원들을 '이'와 '사'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차원과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삶의 차원이 궁극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일치한다고 말한다.


심원한 도리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다시 저 영화 밀양의 주인공으로 돌아간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살인범에게도 용서는 행해져야 하며, 동시에 용서받은 자 또한 내적인 평화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흔아홉 명을 죽인 살인범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만나고 아라한과를 얻었지만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처럼 영화의 살인범 역시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되갚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참회함으로써 그의 내면의 평화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광복 74주년을 즈음하여 불교의 참회법인 이참과 사참을 다시 생각해본다. 참회의 진정성에 대한 종교적 메시지가 오도되지 않기를,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명법스님 구미 화엄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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