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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주거 민주주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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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집의 거주 형태를 자가, 전세, 월세로 구분한다. 대부분의 나라가 자가, 민간임대, 공공임대로 구분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가 부문은 동일하지만 임대 부문은 달리 구분한다. 우리의 경우 임대료를 어떻게 지불하는가에 따라 일시에 목돈으로 내면 전세, 그렇지 않고 다달이 내면 월세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누가 공급하는가에 따르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공식 분류 기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분류는 임대 부문에서 시장과 국가의 역할을 대별하는 데 정책적 유용성이 크다. 공공임대주택이 임대 부문에서 어느 정도인지로 그 나라의 주거 안전망을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 식의 전세와 월세로 구분된 기준으로는 이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오히려 시장 변동기마다 전세난과 역전세난을 반복하며 전세의 월세화는 주거 안정의 위협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전세 난민, 깡통 전세, 월세 살이, 월세 세대는 일상화된 주거 고단함을 대변하며 전세는 우등 시장, 월세는 열등 시장과 같이 비유되기도 한다. 전세라는 언어는 사회 양극화 시대에 주거 경계선을 더욱 선명하게 돋보이게 한다.

주거 정책의 언어에서 빚어지는 이와 유사한 사례는 주택과 비주택의 구분이다. 비주택의 공식 명칭은 '주택 외의 거처'다. 주택의 4가지 요건(영구적인 건물ㆍ한 개 이상의 방과 부엌ㆍ독립된 출입구ㆍ소유 또는 매매의 한 단위)을 갖추지 못한 오피스텔, 기숙사 및 특수사회시설, 여관ㆍ여인숙 등 숙박업소의 객실, 판잣집, 비닐하우스, 고시원 등이 주택 외의 거처에 해당한다. 이 중 특히 오피스텔, 기숙사 및 특수사회시설을 제외한 거처를 비주택으로 통칭한다. 비주택은 주류 주택시장에 들어가지 못한 빈곤층의 대안 주거이자 우리 사회의 최하위 주거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인구ㆍ가구 구조와 삶의 방식이 다양해졌고 이를 담는 주거 형태도 달라졌지만 1970년대 이후 주택 외의 거처라는 박제된 용어로 오히려 열등과 폄하의 공간은 최근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정책 행정 곳곳에는 '자격 요건'과 '지원 대상'이라는 미명하에 무의식적 관행들이 아직 많이 배어 있다. 주거 정책에서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무주택 서민' '주거 취약계층'은 그 정책적 함의에도 무주택자와 취약계층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고 사회적 낙인이 될 수 있다.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정책 우선 지원 가구와 같은 중립적 표현은 어떨까? 유주택자와 무주택자는 자가보유 가구와 임차 가구로, 집주인과 세입자는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공식 명칭화하는 것은 어떨까? 주인집에 세 들어 사는 주종 관계의 임대차 언어로는 주거 민주주의에 이르기가 요원하다. 한국 사회는 부동산이 결정한다고 하던가. 어디에 사는지, 어느 아파트 단지인지, 몇 평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등을 따져 묻는 사회에선 누군가를 주눅 들게 하고 소외시킨다. 주거민주주의는커녕 사회 갈등과 주거 불평등만 증폭될 뿐이다.


이렇듯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차별 짓는 언어와 말들은 이제 존중과 배려, 공존과 상생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동안 주거 여건은 양적ㆍ질적으로 많이 개선됐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공동체 가치'는 집의 상품화와 자산화라는 주거자본주의(residential capitalism)에 밀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주거민주주의의 실현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가치'를 되찾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집 가진 사람도, 집 없는 사람도, 임대인도, 임차인도, 개발업자도, 투자자도, 그 누구의 편도 아닌 '우리'라는 의식은 주거민주주의로의 길을 가장 탄탄하게 다지는 초석이 될 것이라 본다.

진미윤 LH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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