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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발렌스의 죽음

최종수정 2019.08.09 11:13 기사입력 2019.08.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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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에디르네는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이다. 북서쪽으로 불가리아, 서쪽으로 그리스, 남서쪽으로 에게해와 면한 에디르네주의 한가운데다. 런던과 이스탄불을 잇는 철도가 지나며, 간선도로로 중부 유럽과 이스탄불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트라키아의 부족들이 최초로 정착해 살았고 일찍부터 로마 제국에 편입됐다. 125년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재건되고 확장돼, 그의 이름을 따서 하드리아노폴리스로 개명됐다.


에디르네는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의 주요 통로였기에 전쟁터를 면치 못했다. 특히 378년 오늘 동로마 군과 고트족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역사의 변곡점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일컬어 "손실 면에서 로마가 과거 칸나에 전투에서 입은 피해에 필적하며, 로마에 미친 영향은 칸나에 전투의 패배보다 더 치명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칸나에 전투는 기원전 216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이 이탈리아의 칸나에평원에서 로마의 5만 대군을 섬멸한 사건을 말한다.


역사학자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원인을 고대의 난민 위기에서 찾기도 한다. 서기 376년, 고트족 20만명이 도나우강 북쪽 기슭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원래 흑해 북쪽 연안에 살았는데, 훈족의 침략을 받아 난민으로 전락했다. 고트족은 로마 제국에 들어가 살기를 원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발렌스는 고트족의 트라키아 이주를 허락하고 지방 정부에 그들의 정착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트라키아의 총독 루키피누스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고트족의 재산을 빼앗았다. 이듬해 여름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고트족의 저항이 시작됐고, 결국 황제가 출정해야 하는 전투로 이어졌다.


발렌스의 군대는 1만5000~3만명, 고트족 연합군의 병력은 1만~2만명으로 짐작된다.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파견한 지원군까지 합치면 고트족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렌스는 큰 실수를 한다. 고트족 연합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하고 휘하 장군 세바스티아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참혹했다. 로마군 총사령관 세바스티아누스와 부사령관 트라야누스가 전사했고 대대장 서른다섯 명을 잃었다. 발렌스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오두막에 숨었다가 고트족이 지른 불에 타 죽었다고도 전한다.


역사는 대규모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여러 원인 중에 지휘자의 판단을 가장 높은 곳에 놓곤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불행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로마 역사상 희대의 영웅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전역을 통해 증명한 지휘능력 때문이다. 명량대첩의 기적은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존재를 빼고는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성급한 출정이 가져온 발렌스의 참패는 지도자의 어리석음이 초래하는 결과가 어떤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쉽게 이길 수도 있었을 싸움이 참패로 귀결되는 이유 가운데 상당수는 경적(輕敵)이다. 어떤 시대, 어떤 국가, 어떤 종류의 전쟁에서도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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