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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계는 한 송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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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와 '아폴로 11호'의 추억에 젖었던 7월이 갑니다. 인간이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던 광경을 숨죽여 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50주년이라니! 어느 대기업 광고캠페인도 아직 눈에 선합니다. '닐 암스트롱'을 시작으로, 인류 역사에 최초의 깃발을 꽂은 사람들을 내세워 기업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었지요.


두 번째로 달에 내린 사람이 누군지를 물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부끄럽고 당혹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습니다. '버즈 올드린'을 떠올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세 번째 우주인은 더 멀리 있습니다. 외로이 사령선을 지키던 그가 누구였지요?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린드버그' 다음으로 대서양 횡단비행을 한 사람과 '아문센'보다 2주 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탐험가가 누구냐 물었습니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요.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그저 머리를 긁적였을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광고는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세계일류'가 되지 못하면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음을 역설했습니다. 지당하고 고마운 충고였습니다. 광고 하나가, 나라 안의 꿈꾸는 모든 개인과 법인의 성취욕을 한껏 부추기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이 스미진 못했습니다. 사자의 포효처럼,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았습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요? "2등을 기억해줍시다." 그랬으면, 로봇처럼 차갑고 딱딱해보이던 얼굴에서 사랑의 미소를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등기업의 동력이 첨단기술만은 아님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손꼽히는 기업답게 미덥고 의젓한 마음씀씀이를 확인시켰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집'이라 써 붙인 식당이 생각납니다. '왜 제일 맛있다고 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일등의 자리는 비워두고 싶습니다. 그것은 자화자찬으로 차지하거나 쟁취하는 '타이틀'이 아니라, 수많은 2등이 흔쾌히 모시고 지켜주는 외경의 이름이어야지요."


진정한 일등은 거기 앉은 것이 너무도 온당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 무대 치장에만 공력을 들이지 않고, 이른바 상생(相生)의 마당을 마련할 줄 압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튼튼하기로는 우리 제품이지만, 가볍기로는 저쪽 물건이 윗길입니다."


동화적 상상을 해봅니다. '한 골목에 냉면집이 둘 있다면, 양쪽 다 잘되기는 쉽지 않다. 두 집 주인이 만나서 이런 약속을 주고받으면 어떨까?' "우리는 물냉면만 하고, 그쪽은 비빔냉면만 하면 어떻겠소? '비빔'손님은 그리 보내드릴 테니, '물'손님은 이리로 안내해주시구려."


같은 길에 마주보고 있는 치킨 집 사장들이 따라한다면, 이런 제안이 오고 갈 것입니다. "우린 '프라이드 전문' 간판을 걸 테니, 그쪽은 '양념 전문'으로 하시오. 일등과 이등 물건 하나씩 공평히 나누자는 거요." 그냥 웃어넘기셔도 좋습니다. 백면서생의 철없는 생각이니까요.


아무려나 어느 분야 '일 이 삼등'이든, 올림픽 시상대 메달리스트처럼 가까운 사람들. 시합이 끝나면 뜨겁게 끌어안기도 하는 이웃입니다. 서로 소중한 존재임을 알지 못할 때, 행복한 일등은 없습니다. 식당과 기업의 일이 다르지 않고, 국가 간의 관계가 그러할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자신의 클로즈업 사진만 찍고 있는 일본에 권합니다. 줌아웃(zoom out)을 거듭해서, 달나라쯤에서 현해탄 양쪽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과 미국 우주인들이 보고 왔듯이, '만공(滿空)' 스님도 밝히셨듯이, 지구는 한 송이 꽃(世界一花). 한국과 일본은 나란한 두 꽃잎입니다.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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