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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애국심과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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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두 나라가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외교 분쟁이나 전쟁 등을 치른다고 가정해보자. 두 나라를 각기 대변하는 언론사들의 보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어느 쪽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두 나라의 이해와 상관없는 제3국 언론의 해설 기사를 읽는 것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다. 언론은 객관적 시각에서 진실을 보도해야 하지만 국익이 걸린 정치, 외교, 경제 등의 갈등 국면에서는 당사국 언론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객관적 사실 보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간의 영토 분쟁, 중국과 미국 간의 무역 분쟁에서도 각 나라 언론은 정권이 바라는 의도대로 기사를 쓰고 보도하는가 하면, 국익 수호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일방적인 주장을 펴곤 한다.


최근 불거진 한일 간의 갈등과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의 무역 도발을 계기로 대부분 언론은 일본의 경제 침략을 비난하는 청와대와 정치권의 대응을 시시각각 보도해왔다. 심지어 정부 고위 관료가 직접 나서 "반일 아니면 친일, 애국 아니면 매국"이라며 국민을 자극하기도 한다.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 지난 몇 주 동안 일본 여행 자제,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이 확산되는 등 국민의 분노와 호응도 커졌다. 얼마 전엔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이 부산의 일본 공관 내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우리 정부의 강경한 대응 방식에 대해 비판하면서 원만한 외교적 해결을 주문한 언론사들도 있었다. 정부와 시민들의 원성과 비난이 쏟아졌다. 외적 앞에서 우리 선수를 비난하는 격이라며 친일파, 토착왜구와 같은 원색적 욕설이 퍼부어졌다. 대중의 거센 비난 때문인지 지난 며칠간 이들 언론사의 주요 기사에서는 비판적 헤드라인이 사라졌다.


사실 보도와 객관적 분석이 생명인 언론인들에게 국익과 애국심은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아킬레스건이다. 세계 어느 나라 정권이든 애국심을 앞세워 국내 여론을 결집하고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린 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던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에서는 대량살상무기 위협과 미국 내 안보 위협을 내세우며 국민을 상대로 침공 당위성의 홍보에 열을 올렸다. 정부 내 주전론자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비판적인 분석 기사를 게재한 일부 언론사들은 '반역자 집단'이라거나 '반미국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서로 눈치 보기에 바쁘던 대다수 언론사는 애국심을 부추기는 기사들을 쏟아내면서 부시 정권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그 뒤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막무가내식으로 대외 정책을 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권에 대해 비판적 논조를 펴는 미국 내 언론사들이 적지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고위 관료들은 이들 언론사를 '매국적인 가짜 뉴스 공장'이라며 비난하고 조롱하기 일쑤다. 여기에다 골수 지지자들을 통해 "이들 언론사를 보이콧하고 문 닫게 하라"고 외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대다수 언론사가 정권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혹시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한마디로 '애국심'과 '국익 수호'라는 슬로건은 비판적 언론의 입을 막는 편리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주한 미군의 고고도미사일체계(THAADㆍ사드) 배치 여파로 한중 무역 갈등이 한창일 때 중국 내 거의 모든 언론 매체가 똘똘 뭉쳐 한국을 비난하고, 한국 여행을 금지시키고, 중국 내 한국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부추긴 것도 중국 관영 언론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한마디로 정권과 언론이 일심동체 파트너가 돼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적 여론을 조성하면서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다.


정치적 격변이나 경제난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언론이 되새겨야 할 질문이 있다. 언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진실을 보도하는가. 적지 않은 언론인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보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최근 국내외 상황에 비춰보면 우리 언론인들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보도한다는 대답이 나올 법하다. "나라 사랑과 국익 수호에 언론이 동참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애국심과 국익 앞에서는 이성과 진실이 가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김헌식 미국 콜로라도대학교 언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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