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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7] 고개 돌린 소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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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하짓날을 향해 달리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정오. 길을 걷다가 문득 놀라운 소녀를 발견합니다. 제가 부른 것도 아닌데 그녀는 지금 막 왼쪽 어깨를 틀더니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봅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만 얼어붙습니다. 환한 대낮인데도 주위가 온통 새카맣게 변합니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얼굴만 눈에 들어옵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하얀 목깃이 달려 있는 짙은 황토 빛의 낡은 외투를 입고 있는 소녀. 이곳 로마 사람 같지 않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서아시아의 중세쯤에서 날아온 듯한 이국적인 미모.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쳤는데 한 시간 이상 서로 바라보는 기분입니다. 눈동자가 크고 아름답습니다. 아쉬운 듯, 애잔한 듯, 총명한 지혜가 부끄럽게 숨어 있는 눈입니다. 콧날은 아담하게 오똑하고 얌전합니다. 치아가 살짝 보이게 벌어진 입술. 소녀답지 않게 붉어서 고혹적입니다. 무슨 빛이 찾아 들어 거기 노크를 한 것인지 아랫입술 가운데 부분이 촉촉하게 빛납니다.

소녀는 분명 제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합니다. 유럽을 떠도는 나그네는 알아들을 자신이 없습니다.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쯤 되었을까요? 아니면 두어 살 더 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저를 이토록 애타게 쳐다보는지, 저 맑은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 속에, 무슨 말이 그리 많이 감추어져 있는지, 걸어가는 저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동차 소리, 거리의 음악 소리,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목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사라집니다. 여기는 소리 왕궁 한복판의 무음별실(無音別室). 그녀의 왼쪽 귓불 아래 달린 희고 큰 진주 귀고리만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모릅니다.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1632~1675)가 그린 명화 <진주 귀고리의 소녀>(1665)의 주인공이라는 점만 알 뿐. 압도적인 이미지와 오묘한 분위기 때문에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기도 하는 소녀.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 있어야 할 작품이 로마 길거리에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것도 길바닥에 말이지요. 어찌 된 사정이냐고요?


웬만한 유럽 도시에는 길거리 화가들이 많습니다. 주요 건물이나 명작 모방품을 즉석에서 그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지요. 로마에도 길거리 화가들이 많지만 이들 중엔 흥미로운 예술가도 있습니다. 사람 다니는 보행로에 버젓이 그림 그리는 이들. 분필이나 파스텔로 명화를 복제하는 ‘길바닥 화가’들입니다. 그림을 통째로 외웠을까요? 어찌나 똑같이 그리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도로의 피카소’로 불리는 영국의 괴짜 화가. 길바닥에 3D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그림을 그리는 줄리안 비버의 재미난 작품들을 본 적은 있지만, 길바닥 명화는 로마에서 처음입니다. ‘예술의 생활화’라고 불러야 할지, ‘생활 자체가 예술’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세기의 명화를 길바닥에 재현하는 이탈리아의 문화를 보면, 이 나라가 ‘뼛속까지 예술의 나라’라는 걸 실감합니다. 얼마나 많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얼마나 많은 미켈란젤로가 21세기에도 활동하는지 가늠할 수 있지요. 나중에 거장이 될 재목도 ‘자칫하면’ 거리의 화가가 될 수 있는 게 예술의 세계입니다. 도중의 어떤 작은 계기가 나중에 큰 차이를 만들게 되지요. ‘뼛속까지 예술의 나라’, ‘사람 다니는 길 위에도 명화가 널려 있는 나라’의 이미지는 이런 겁니다. 단순히 길거리 괴짜들의 해프닝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생활이 된 오랜 전통의 물결인 것이지요.


그 전통 속에는 경배해야 할 ‘신비한 분위기(Aura)’만 있는 건 아닙니다. 비버의 착시 그림이 ‘유쾌한 장난’이라면, 길바닥 명화는 ‘애틋한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길바닥 화백은 자기 그림을 판매할 수도 없지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지워야 합니다. 이들은 몇 시간 만에 사라질 ‘부질없는 그림’의 욕구를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충족시키곤 하지요. 소녀. 풋여인. 영원한 풋여인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만났으니 저도 기부금을 몇 유로쯤 냅니다.


제 맘 한쪽에는 그래도 애틋함이 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즐겁고 유쾌합니다. 묘기에 가까운 재현 솜씨에 박수를 쳐주는 행인을 만나면 친구처럼 대해주기도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 차고 넘치는 명품 예술들. 잘할 줄 아는 게 그림밖에 없는 사람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길에서 살아갑니다.


길 가는 이가 행인(行人)이라면 길에서 노는 이들은 유행인(遊行人) 아닐까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요한 하이징아가 인간을 일컬어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부른 ‘놀이하는 인간’. 행복한 놀이인간을 여기 로마 길거리에서 봅니다. 유행인(遊行人)은 곧 유행인(遊幸人)입니다. ‘오, 즐거운 인생! 오, 행복한 마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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