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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최종수정 2018.11.02 09:37 기사입력 2018.11.0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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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한때 평야로 불리던 땅은 지평선까지 아파트로 덮였다. 그래도 변두리 곳곳에 난민처럼 웅크린 논이며 밭이 위대했던 날들의 대지를 추억하게 한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가을걷이 끝낸 무논에 마지막 윤기가 돈다. 곳곳이 찢어진 비닐하우스 문짝도 잠시 숨을 고른다. 소란스럽게 지저귀며 날던 텃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 계절은 가을인가 겨울인가. 한낮에 나가 보면 햇볕에 뜨끈하게 데워진 흙이 씨앗을 뿌리면 당장이라도 싹을 틔워줄 듯하다. 그러나 해질 무렵이면 뼛속 깊이 냉기가 스며, 들과 숲에 깃들인 생명들의 귀가를 재촉한다. 명계(冥界)의 여왕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와 헤어져 남편 하데스의 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숨을 깊게 쉰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섞여 고운 음악처럼 들린다.

위대한 여름은 기억으로 남았다. 선명한 기억 속의 저 들은 생명의 에너지를 싹 틔우고 길러내 도시로 보냈다. 그리고 홀로 남아 모든 것을 말한다. 해와 달, 낮과 밤, 빛과 어둠, 위와 아래, 남과 여, 사랑과 미움, 우연과 필연,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침묵은 무겁고, 깊다. 무게와 깊이를 견디기 위해 긴 밤이 필요하다.

11월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디뎌 내면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나는 계절. 죽음과 얼굴을 마주보며 삶의 비의를 더듬는 시간이다. 아마도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이 달을 '위령(慰靈)의 달'로 삼고, 특별히 오늘을 위령의 날로 점찍었을 것이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리하여 인간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할 수 없음을 깨우치게 한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 앞에 숙연해진다. 그리고 슬퍼한다. 그 슬픔은 한 생명의 소멸을 슬퍼하는 동시에 내 삶의 소멸을 슬퍼하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 속에 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 있는 나의 존재, 그것은 생명이다. 기억, 추억, 사랑이나 우정, 이렇게 명명한 것들. 타인의 삶 속에서 그 일부가 된 내 존재의 소멸에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흩어진 집집마다 창에 불이 밝아온다. 닮은 얼굴들이 식탁에 둘러앉을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잘 먹겠다, 고맙다고 기도하리라. 굳이 기도가 아니라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거룩한 만찬을 맞을 것이다. 표준화된 기도 양식을 많이 보유한 가톨릭에서는 마침기도도 권장한다. 잘 먹었다, 감사하다는 내용과 아울러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창조주의 자비를 입어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식탁은 산 사람만의 자리가 아니다. 죽은 이의 무릎이 내 무릎에 와서 닿는다. 햇곡식을 저작(咀嚼)하는 나의 행위는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기도와 다름없다. 저 들에서 싹트고 자라 내게 이른 생명의 에너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바로 이 식탁에 다름 아니며 죽음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식탁 위에서, 나의 그득한 목구멍에서, 나의 내면에서 삶과 죽음은 버무려져 하나가 된다.

삶은 오직 진실이며 11월의 저녁은 우리 삶의 최전선이다. 이 세상에 가장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하자.

강화가 멀지 않은 김포의 들녘에서.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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