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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납골당 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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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납골당 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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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추석의 기억은 성묘다. 추운 설에는 어른들만 산을 찾았지만, 추석에는 어린 손자까지 동행했다. 할아버지 산소는 용인에 있었다. 시외버스가 다니기는 했지만 두 시간에 한 번이고 명절에는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 만원이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먼지 나는 길을 따라 걸어서 모퉁이를 세 번 돌면 언덕에 산소가 있었다. 십리 길이었다. 그보다는 시내버스 종점에서 내려 산을 넘어 가로지르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고추를 말리느라 온통 붉어진 포장도로가 끝나고 산길이 시작되면서 아이들이 주저앉는다. 삼촌들은 조카들을 하나씩 둘러업고 산을 올랐다. 산소에서 지낼 간단한 차례 음식도 큰 짐이 되었다.


할머니는 항상 맨 앞에서 성큼성큼 길을 인도했다. 굽은 허리로 지팡이에 의지하던 할머니지만 성묫길에서는 괴력에 가까운 속도로 산을 올랐다. 막상 산소에 도착해서 가족들이 간단한 벌초와 차례 준비로 분주할 때 할머니는 모퉁이에 앉아 계셨다.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깊게 피우셨다. 그게 할머니의 추모이자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짐작했다. 그 후로 할아버지 묘소는 도시개발로 이장해서 절로 모셨기에 당분간 성묘는 없었다.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0여년을 더 사신 후였다. 할머니는 화장 후 납골당에 모셔졌다. 하지만 납골당 성묘는 어색하다. 꾸불꾸불 외길을 따라 앞차의 꼬리를 물고 느리게 산을 오르면 주차장을 먼저 만난다. 이후의 풍경은 차라리 교외의 쇼핑몰에 온 느낌이다. 밝은색 돌과 유리로 단장한 건물이 맞이한다. 자동문을 거쳐 들어서는 로비에는 대리석이 번쩍이고 천창으로 햇볕이 쏟아진다. 추모의 방식도 어색하다. 할머니의 추억은 유리창 안에 갇혀 있다. 작은 유골함과 생전의 사진과 시들지 않는 조화가 할머니의 평생의 굴곡을 표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성묘는 손으로 풀을 몇 가닥 뽑아내거나 술을 끼얹으며 묘소를 한 바퀴 도는 작은 의식이라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간적이며 공감각적이었다. 손에 잡히는 뻣뻣한 풀의 감촉, 청주와 가을이 섞인 냄새, 비탈 끄트머리에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무릎을 굽히는 작은 제례가 몸의 여러 감각을 건드렸다. 할머니의 작은 아파트 납골당에서는 어떤 추모의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난감하다.


납골당의 어색함은 한국 건축의 나태함이다. 오랫동안 죽은 자를 위한 건축의 경험을 축적한 서양과 달리 우리의 산소는 ‘산’에 있는 것이었다. 산이라는 한국의 공간은 그 자체뿐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경로와 경험이 중요하다. 이를 도시적으로 압축하고 공간으로 구현하지 못한 것이 어색함의 근원일 것이다. 내부 공간도 마찬가지다. 성묘라는 공간적이며 공감각적 행위를 납작하고 단순하게 눌러 8층으로 쌓다 보니 성묘라 부르기에 민망한 밋밋한 경험을 하고 돌아오게 된다.

물론, 새로운 용도의 건축형식이 등장할 때마다 혼돈과 문화적 지연이 따른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용도에 적합하고 행태를 예견하고 제시하는 것이 현대 건축가의 도전이자 임무이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한 세대 만에 급격하게 바뀌었다. 새로운 장례와 추모 문화를 건축이 못 따라가고 있다는 아쉬움이 든다. 외진 땅을 비싸게 팔 수 있는 부동산 사업이 아닌 진정한 추모와 기억의 건축공간을 기대한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할머니처럼 담배 한 대를 깊게 피워보려 했지만 큼지막한 금연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납골당 성묘는 어색하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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