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누가 이겼는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승부'의 결과가 궁금한가. 국수(國手) 조훈현 9단과 신산(神算) 이창호 9단의 대결. 승자를 미리 안다면 영화의 매력이 떨어질까. 최종 승자에 관한 물음은 어쩌면 우문(愚問)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요체는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경쟁에서 각자가 터득한 깨달음이기에….
결과에만 집착하면 박스 오피스 1위를 질주한다는 영화 승부의 매력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 흥미진진한 공간의 미학.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내려놓음이다. 이는 포기와는 의미가 다르다. 집착의 반대말에 더 가깝다. 내려놓음의 대상은 여럿이다. 독선과 아집, 자만심과 근거 없는 낙관에 관한 내려놓음이다.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의미의 승부에 나설 자격이 생긴다.
패배는 쓰라리다. 하지만 쓰라림을 내 안의 독으로 남겨 놓아서는 곤란하다. 그게 쌓이고 또 쌓이면 맑은 정신으로 훗날을 도모할 기회까지 상실한다. 조훈현과 이창호가 세계 바둑사에 빛나는 별이 된 이유는 패배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내려놓은 뒤 성찰할 수 있었기에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나라를 대표하는 바둑기사를 일컫는 국수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 한 사람 조훈현. 그가 위대한 기사인 이유는 화려한 성적표 때문만은 아니다.
조훈현은 신산 이창호의 기재(棋才)를 일깨운 장본인이다. 조훈현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창호라는 기사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91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세계 바둑 랭킹 1위를 지켜온 이창호의 업적은 홀로 일군 결과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누군가 흑돌을 반상에 올려놓으면 다른 이가 백돌로 응수해야 바둑이 이어진다. 흑돌과 백돌 모두를 자기 혼자서 두어 나갈 수는 없다.
상대가 있는 승부라는 점에서 바둑과 정치는 닮은꼴이다. 결과 자체에만 매몰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도 비슷한 점이다. 바둑이 그러하듯 정치도 성찰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내공이 생긴다. 마음이 급하다고 대충 주춧돌을 준비한다면 그 건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기초를 다지는 담금질의 과정이 바로 내려놓음이다.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왜 국민에게 지지를 구하는가. 출세에 관한 욕망과 권력의 단맛이 끌려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손을 잡아줄 용기와 열정을, 담금질의 과정을 토대로 품었기 때문인가. 공적인 마인드가 결여된 이는 좋은 공직자가 되기 어렵다. 그런 이가 권력을 탐하면 국민이 괴롭다.
오는 6월3일 제22대 대통령 선거에는 내려놓음의 철학을 품은 이가, 자기보다는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려는 이가 경쟁의 기회를 잡기 바란다.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이가 펼치는 한판의 정치 대국,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승부 아니겠는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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