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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Rhythm 0/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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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72개의 사물이 놓여 있습니다.


장미, 향수, 빵, 와인, 깃털, 꿀, 가위, 못, 쇠막대, 외과용 수술칼, 권총, 총알 한 개, 채찍, 사슬, 바늘, 망치, 톱, 립스틱, 스카프, 거울, 유리잔, 카메라, 책, 머리핀……

이 사물들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두려움과 고통만이 내게 속한 것입니다.


자아, 당신을 끌어당기는 사물이 있나요?

당신 속의 두려움과 욕망에 따라 무엇이든 선택하세요.

테이블 위의 사물들로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옷을 잘라 낼 수도 있고 머리에 총을 겨눌 수도 있어요.

장미 가시로 나를 찌를 수도 있고 향수를 뿌릴 수도 있어요.

내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있고

내 유방을 만지거나 입을 맞출 수도 있고

다리 안쪽에 칼을 꽂거나 목에 상처를 내어 피를 마실 수도 있어요.

나를 해치거나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물론 한때라도 죽고 싶었거나 죽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여섯 시간 후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될지 궁금하군요.

조각상처럼 숨죽인 육체 위로

당신의 행위가 남긴 흔적, 그게 바로 나입니다.


그래요, 나는 극단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새벽 두 시, 퍼포먼스는 끝나고

나는 주술에서 풀려난 인형처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어떤 종류의 리듬도 허락되지 않은 새벽에.


[오후 한 詩] Rhythm 0/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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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듬 0'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츠의 퍼포먼스 작품으로, 퍼포먼스의 내용은 시에 적힌 그대로다. 즉 테이블 위에는 "장미, 향수, 빵, 와인" 등 72개의 사물이 놓여 있었는데, 관객은 그것들로 아브라모비츠에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처음엔 머뭇거렸다고 한다. 그러다 꽃을 꽂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자 칼로 아브라모비츠의 옷을 찢고 장미 가시로 몸 여기저기를 찌르고 립스틱으로 낙서를 하고 칼로 목에 상처를 내어 그 피를 마시고 심지어는 머리에 총을 겨누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눈물을 닦아 준 이도 있었다지만. 아, 인간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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