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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타자기] 지리산 시인이 지리산에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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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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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지희 기자] 20년이 넘도록 지리산이 곧 집이었다. 지리산 빈집으로 거처를 8번이나 옮겼다. 3만리를 걸으며 생명평화운동을 외쳤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110만㎞ 넘게 달린 이력도 인상적이다. 신작시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는 이렇듯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이원규 시인이 11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시인의 독특한 삶부터 읽어내려가야 하는 이유다.


이원규 시인은 평소 ‘시는 발로 쓰는 것’이라는 이른바 ‘족필(足筆)의 시학’을 주창해온 인물이다. 시인의 이력에 비춰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발자국이 찍힌 지리산과 한반도 곳곳이 시의 배경이 된다. 그래서일까. 여타 시들과 달리 이원규 시인의 시는 공간이 메시지의 앞에 위치한다. 공간 자체에서 메시지가 이끌려나오는 것이지, 메시지를 위해 공간이 활용되진 않는다.

물론 시인에겐 집이나 다를 바 없는 지리산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공간이다. 사이사이 지리산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묻어난다. 마치 서툴지만 진솔하게 적어낸 ‘지리산을 위한 헌사’같다.


‘한 여인이 자살하러 지리산에 왔다가 그냥 갔다//새끼손톱만한 청노루귀 한 송이 보았을 뿐/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서울에선 죽을 일이 지리산에선 도무지 죽어 마땅한 일이 아니었다..(’그때는 울고 지금은 웃는다-격외론1‘ 중)’


‘...이따금 생의 패가 풀리지 않아/꺼억꺽 목울대를 조르다 잠이 들면/노고단 마고할미가 유장한 능선의 왼팔을 내밀어/스리슬쩍 팔베개 해주던 그런 밤이 있었다/푹신한 낙엽요를 깔고 함박눈 이불을/눈썹까지 끌어올리던 지리산 화개동천의 새벽/팔베개는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다/..’(‘지리산 팔베개’ 중)

시인의 삶을 통해 보면 모든 시가 일관되게 자연을 재료로 택한 이유도 이해하기 쉽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재료는 ‘꽃’이다. 이름조차 낯선 꽃들이 작품에 어떤 향기를 불어넣는지 관찰하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시 자체만 본다면 한 눈에 매료되는 ‘예쁜 시’는 못 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의 "시가 예뻐서 읽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읽고 쓰는 것이다"라는 외침을 떠올려 볼 법한 시들이다. 세련되기 보다는 투박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하다 거칠게 치고 들어온다. 그럼에도 특별할 것 없는 자연 속 일상과 사물을 시적인 순간으로 환원해낸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읽고 쓸’ 의미는 충분하다.


시집 속 시들은 사진과 떼어놓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각 장에는 한 데 묶인 시들과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사진들이 담겨 있다. 직관적으로 보면 대부분은 시와 연관성이 없어 보일뿐 아니라 시의 운치를 해치는 기분까지 든다. 그래서 시는 시고, 사진은 사진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무관계성이 사진에 깊이를 더한다는 게 이 시사진집의 포인트다. 풍경의 의미를 찾아 더 자세히, 더 집중해서, 더 오래 살피다 보면 사진이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다른 표정의 사진과 함께 시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달라진 얼굴로 시가 새롭게 다가올 때 있다. 그렇게 시와 사진이 하나의 경험이 된다.


아직은 저혈압의 풀잎들/고로쇠나무 저도 관절이 쑤신다

별자리들도 밤새 뒤척이며 마른기침을 하고/길바닥에 얼굴 처박은 돌들도 소쩍새처럼 딸국질 한다

그대 아주 가까이/530리 섬진강도 유장하게 흐르다/굽이굽이 저 홀로 몸서리치고/살아 천년 죽어 천년 지리산 주목/고사목들도 으라차차 달빛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서러워 서럽다고 파르르 떨지 말아라/외로워 외롭다고 너무 오래 짓무르지 말아라

섬이 섬인 것은 끝끝내 섬이기 때문

여수 백야리 등대도 잠들지 못해 등대가 되었다(표제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이원규 지음·이원규 사진, 역락>






김지희 기자 way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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