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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만산군 임팔라실리와 태종 이방원

최종수정 2019.01.16 14:19 기사입력 2019.01.1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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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만산군 임팔라실리와 태종 이방원
1402년 3월 6일,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최유경이 귀국했다. “연병(燕兵)의 기세가 강하여 승기를 타고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는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달단(몽골)의 군대가 이 틈을 이용해 연(燕)과 요(遼) 사이로 침략하여 중국이 어수선합니다.” 최유경은 명나라의 정세를 다급히 보고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 1398년에 사망하자, 장자 주표의 맏아들 주윤문이 건문제로 즉위했다. 2대 황제 건문제는 북방에서 거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연왕(燕王) 주체를 견제하고자 했다. 연왕 주체는 건문제의 삼촌이었다. 주원장의 4째 아들과 주원장의 맏손자가 다투게 된 것이다. 1399년부터 본격화된 내전은 처음에는 건문제가 우위였으나, 1402년 연왕 주체가 수도 남경을 기습 공격해 함락하면서 끝이 났다. 1402년 7월 17일, 연왕 주체는 3대 황제 영락제로 즉위했다.

최유경의 귀국 보고는 연왕 주체가 남경을 함락하기 수개월 전의 일이다. 당시 조선의 경우 태종 이방원이 3대 국왕으로 즉위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방원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쳐, 1400년 11월에 2대 정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조선의 정치적 상황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1402년 3월부터 요동(遼東)의 난리를 피해 도망오는 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녀 90명이 의주(義州)로 도망해 왔고, 또 백성 150호가 이성(泥城)에 도착했다. 3월 26일에는 만산군(漫散軍) 2000여 명이 강계(江界)에 이르렀다. 만산군은 명나라 요동에 군정(軍丁)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군역과 요역을 피해 달아난 고려인을 의미한다. 명나라 건국 초기 요동은 한인(漢人)이 70%, 고려인과 여진인이 30%를 차지했다. 요동 25위(衛) 2주(州)의 호구수는 27만여 호였고, 군대수는 12만여 명에 달했다.

요동의 정세 변동에 따라 이주민이 급증하자, 내서사인(內書舍人) 이지직과 좌정언(左正言) 전가식이 상소를 올렸다.
영락제

영락제

“도망한 자를 부르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임은 『춘추(春秋)』에서 깎아내리는 것이옵니다. 오늘날 요동(遼東)?심양(瀋陽)의 백성들이 기근을 핑계로 망명하여 붙습니다만, 이들은 비록 본조(本朝)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전에 이미 우리를 배반하였고, 오늘은 또 저들을 배반하니 반복하여 믿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제 대국(大國)을 신하로서 섬기옵는데, 다시 배반자를 받아들인다면 사대(事大)의 의리에 어긋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도망하여 와서 붙는 자는 바로 붙잡아 되돌려 보내게 하고 나라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3월 29일, 요동의 군사 5000여 명이 만산군을 추격하여 이성(泥城)에 이르렀다. 요동 총병관(總兵官)은 조선으로 달아난 만산군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태종은 거부했다. 만산군으로서 조선에 온 자는 없으며,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인근 산골짜기가 깊어서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는데, 혹 알게 된다면 잡아 돌려보내겠다고 답변했다. 만산군의 송환이 양국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지만, 태종은 만산군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4월 5일, 의주(義州) 천호(千戶) 함영언이 입궐했다. 함영언은 요동의 정세를 직접 보고 듣고 돌아온 자였다. 그를 통해 동녕위(東寧衛) 천호(千戶)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가 3000여 호를 거느리고 배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河) 지휘(指揮)와 요(姚) 천호(千戶) 등이 1500명을 거느리고 임팔라실리를 추격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길거리에 효수되었다. 또 임팔라실리는 추격해온 심양위(瀋陽衛)?개원위(開原衛) 군사의 반수를 죽인 후 포주강(鋪州江: 파저강)을 건너 강계(江界)에 근접해왔다. 임팔라실리는 “조선에 귀부하고자 하는데 만약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다”고 말을 전했다.

함영언은 압록강 이북에 임팔라실리가 죽인 군사들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활, 창, 갑옷, 투구 등 버려진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였다. 태종은 임팔라실리의 무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고, 함영언은 만여 명은 되는 것 같다고 답변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2년 4월조에는 임팔라실리가 3000여 호를 거느렸다고 되어 있고, 5월조에는 1만8600호를 거느렸다고 되어 있다. 정리하면 이들은 3000여 호로서 총 1만8600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4월 16일, 태종은 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만산군의 처분에 대해 의논케 했다. 태종은 이들을 강변에 그대로 두고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이들을 입국시켜 각처에 분산시킬 것인지를 고민했다. 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식량이 떨어지면 난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고, 군사를 모아 방어케 하면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놓칠 것을 염려했다. 강변에 그대로 두고 지켜보자는 사람이 스물세 명, 강을 건너도록 해서 각처에 분산시키자는 사람이 열두 명이었다.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은 “지금 허용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굶주림에 다달아 반드시 해를 끼칠 것입니다. 비록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결국 태종은 임팔라실리의 무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태종은 통사(通事) 최운에게 지침을 하달했다. “네가 정료위(定遼衛)로 가게 되면 다만 ‘만산군이 포주(鋪州) 등지에 와서 주둔하고 있는데 그들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알지 못하겠다’하고, 요동 사람이 만약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치려고 하면 너는 ‘포주 등지는 산수(山水)가 깊고 험하여 대군(大軍)이 갈 수 없다’고 하라.”

5월 4일, 임팔라실리의 무리는 갑옷, 투구, 활, 화살, 창, 칼, 깃발, 나발, 징 등을 바쳤다. 조선은 임팔라실리 등 지휘부 10여 명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예빈시윤(禮賓寺尹) 최관은 이들에게 음식을 먹이며 긴장을 풀게 했다. 하지만 이들이 음식을 먹고 공손히 감사의 절을 할 때 전격적으로 결박하여 가두어 버렸다. 5월 8일, 태종은 임팔라실리의 송환 문제를 삼부(三府)에 명하여 논의케 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5월 13일, 임팔라실리는 평양에서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 좌군(左軍) 도독부(都督府)로부터 만산군을 돌려보내달라는 문서가 도착했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의 요구를 묵살했다. 5월말 먼저 만산군 869명을 풍해도(?海道: 황해도 일대)에 분산 배치하고 식량을 지급했다. 이어 9월 17일, 태종은 다시 임팔라실리의 무리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배치했다. 전라도에 1585명, 경상도에 1297명, 충청도에 854명 등 총 4224명이었다.

조선 태종의 무덤인 헌릉

조선 태종의 무덤인 헌릉

태종이 만산군에 대한 명나라의 송환 요구를 묵살하고 이들을 입국시켜 각 도에 분산 배치한 것은 명나라와의 대결도 각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9월 11일, 태종은 우정승 이무에게 축성 작업에 대해 문의했다. “이성(泥城)과 강계(江界)는 이미 끝났고, 의주(義州)는 돌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이성, 강계, 의주는 모두 북방 국경일대의 주요 거점이다.

그런데 12월말 태종은 돌연 입장을 바꾸었다. 12월 23일, 형조(刑曹) 전서(典書) 진의귀로 하여금 임팔라실리를 압송하여 요동으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1월 21일에는 각 도에 지인(知印)을 나누어 보내 만산군을 추쇄하도록 독촉했다. 결국 1403년 1월 27일, 만산군 총 3649명을 요동으로 돌려보냈다. 앞서 각 도에 분산 배치한 만산군이 4000여 명이었으므로 거의 대부분을 추쇄하여 송환했음을 알 수 있다. 요동의 난리를 피해 조선으로 넘어와 정착했던 이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태종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대명 강경파였던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하고 정국을 장악했다.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받지 못했던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건문제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원칙대로 본다면 연왕 주체가 건문제를 친 것은 반역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즉위했던 것처럼, 연왕 주체가 조카를 내전으로 몰아낸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건문제와 연왕 주체의 내전이 지속될 때에는 만산군을 받아들여 국경 일대의 위험을 제거했다. 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임팔라실리를 비롯한 지휘부 10여 명을 미리 포박해 두었다. 1402년 7월, 명나라 연왕 주체가 건문제를 몰아내자 사태를 주시했다. 당시 조선은 적극적인 정보 활동을 통해 명나라 내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자 곧바로 하등극사(賀登極使)를 파견했다. 영락제 즉위후 요동이 안정되자 다시 임팔라실리를 비롯한 만산군을 대대적으로 송환해 명나라와의 후환을 없애버렸다.

태종 이방원은 요동의 정세 변동에 기민하게 대처했고, 내부적으로는 조사의(趙思義)의 난을 진압하여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조선은 태종의 밑거름 위에 세종의 태평성대가 꽃피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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