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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잡은 'DDT'의 등장, 인류에겐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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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인간의 욕망을 닮은 화학

'우리는 미래를 보는 눈을 잃어버렸고, 인간은 결국 자연을 파괴시키는 끝장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시골 마을이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는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책표지에는 그가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에게 책을 바치며 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책 제목은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 살충제로 생태계가 파괴돼 새가 울지 않는 조용한 봄을 말합니다. 당시 DDT의 수혜 중 하나가 말라리아 퇴치입니다. 말라리아는 플라스모디움이라는 기생충으로 얼룩날개모기류를 통해 인간의 혈액으로 감염되고 적혈구를 녹여버리는 무서운 질병이지요. 말라리아는 질병임에도 저에게는 화학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 이유가 염소계 화합물인 DDT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라리아는 화학과 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어쩌면 말라리아 때문에 화학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결론부터 꺼내면 말라리아로 시작된 인간의 욕망이 지금의 화학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 이들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요.
19세기 유럽으로 시간을 옮겨봅니다. 이전의 화학은 과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연금술이었으니까요. 당시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한 제국주의 영국은 일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영토 확장이라는 욕망에 집중했습니다.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그 욕망의 앞길에 걸림돌이 생겼습니다. 바로 말라리아입니다. 프랑스의 파나마 운하 건설 실패는 말라리아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지요. 영국도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정복에서 말라리아로 많은 인명을 잃었고, 말라리아 치료제를 찾게 됐습니다. 이후 프랑스에서 신코나(Cinchona)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퀴닌(Quinine) 성분이 치료와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퀴닌은 칵테일로 잘 알려진 진 토닉에 들어가는 토닉 워터의 주성분이기도 하죠. 영국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이 원료를 조달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얻는 재료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욕망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말라리아 치료제를 약으로 만들면 엄청난 부를 가져다줄 거라 생각했고 로열 칼리지 오브 케미스트리라는 학교를 런던에 세우게 됐습니다. 이 학교는 나중에 명문대학 화학과의 시초가 됐지요. 당시 학생 중 천재라 불린 열여덟 살의 윌리엄 헨리 퍼킨(William Henry Perkin)은 석유 찌꺼기를 솔벤트에 녹이고 태워 신코나 나무에서 나온 화합물과 비슷한 원소 비율의 유기화합물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이 물질이 정확히 퀴닌은 아니었죠. 솔직히 당시에는 어떤 분자인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화학은 지금과 매우 달랐습니다. 과학의 한 분야라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물론 주술적 성격을 가진 연금술은 18세기에 들어서며 프랑스의 라부아지에에 의해 실험적 원소 개념이 나오면서 막을 내렸지만, 이 시기는 반응물을 원소 비율 정도로 분리하던 시기였지 지금처럼 분자의 화학 구조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퍼킨이 라부아지에의 방법으로 발견한 물질도 퀴닌과 원소 비율만 비슷했지 퀴닌과 화학 구조가 같진 않았지요.

윌리엄 헨리 퍼킨.

윌리엄 헨리 퍼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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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퍼킨은 솔벤트가 떨어져 석유 대신 알코올을 사용했다가 콜타르가 보라색으로 바뀌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보라색 염료가 만들어진 겁니다. 아름다운 보라색을 내는 염료는 자연에서 얻기 어려웠고 설사 있다 해도 추출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인공으로 대량 생산할 방법을 찾은 거지요. 여기에 그의 욕망이 더해졌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이 보라색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그의 야망에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그는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를 접어두고 회사를 세워 염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빅토리아 여왕이 첫 고객이었죠. 보라색 염료는 그를 돈방석에 앉혔습니다. 이 보랏빛 유기 염료를 '퍼킨 모베인(Perkin Mauveine)'으로 불렀습니다. 영국에서 모베인은 영어 단어인 퍼플보다 보랏빛을 대표하는 말이 될 정도였지요.

영국의 대부분 화학자는 퍼킨의 성공을 보고 자연에서 발견하지 못한 인공 화합물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어쩌면 이 사건이 화학 산업의 효시가 된 셈이고 전 유럽으로 유행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대부분 제약 및 화학 회사가 이때 생겨났지요. 당시의 유기화학은 물리학처럼 체계적인 이론과 방정식이 밑받침된 것이 아니라 동식물에서 얻는 유기물 재료를 통해 끊임없는 실험으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나름의 체계를 잡아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치료제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해열제인 아스피린도 버드나무에서 추출하기 시작해 당시에 설립된 바이엘이라는 회사에서 아세틸살리실산으로 만들어졌지요. 하지만 여전히 화학은 실험 수준이었고 물질의 피상적인 모습만 훑어볼 수 있는 수준에서 유기화학의 발전은 한계를 가지게 됐습니다. 말라리아 치료제는 여전히 합성되지 않았고 인류는 분자를 다룰 수 없었습니다. 분자가 구조를 가지는지 몰랐으니까요. 어쩌면 연금술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유기화학은 100년이란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고 20세기 중반에 와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 변화의 토양에는 물리학에 의해 원자의 세부 구조가 설명되고 양자역학이 완성되면서 원자의 화학적 특성을 이해하게 된 도움이 있었습니다. 물질은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며 특성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됐고, 공유결합과 이온결합에 대한 이해가 등장했지요. 분자 구조가 정립되기 시작한 겁니다. 물리학에서 화학은 양자역학의 응용에 불과하다는 환원주의적 주장도 이때 등장했지요. 그만큼 화학의 이해에는 물리학의 영향이 컸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번스 우드워드(Robert Burns Woodward) 교수가 화학계의 숙원 과제인 퀴닌 분자 합성을 해냈습니다. 단순히 말라리아 치료제를 합성한 업적을 넘어 분자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며 유기화학을 정립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말라리아는 화학의 출발점과 확립을 관통하는 길에 있었죠. 이제 인류는 상상하는 그 어떤 분자라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유기화학 확립은 인간의 욕망에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화학 산업으로 확장해 나일론이 등장하고 합성수지인 플라스틱이 등장했지요. 말라리아를 근원적으로 없애는 살충제인 DDT도 만들어졌습니다. 동시에 화학은 제약 산업으로 번져갔습니다. 셀 수 없는 신약이 만들어지며 인류의 생명 연장을 실현했죠.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유기화합물이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습니다.

로버트 번스 우드워드

로버트 번스 우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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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화학은 말라리아만큼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화학에 대한 공포를 의미하는 '케모포비아(케미컬+포비아)'라는 신조어를 낳았습니다. 심지어 화학 혐오로 '노케미족'이 등장하기도 했죠. 수천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사고라기보다 참사에 가까웠고 아직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분별하게 사용된 플라스틱은 부메랑이 돼 인류를 역습합니다. 과거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을 퇴치하고 농작물 생산에 이바지한 DDT도 분해되지 않고 지금까지 토양에 남아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 박테리아가 등장합니다.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화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천 년을 지배했던 연금술부터 지금의 화학 산업 전성기까지 화학은 인간의 욕망에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물질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탐구했던 과학 정신도 있었지만, 영원한 부와 생명을 얻기 위한 인간의 욕망으로 시작되고 지속된 겁니다. 자연은 경쟁 상대가 없는 거장이지요. 그런 자연이 만든 물질의 분자 구조를 미세하게 변형할 수 있는 인류의 능력은 분명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에 대항해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는 신약일 수도 있고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물질로 인류의 삶에 편의와 부를 가져다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류의 과학적 능력이 모든 일을 쉽고 이롭게 만드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한계가 없는 듯 보이는 이 능력이 욕망의 만족에 머무른다면 자연과 인류를 공격하는 침묵의 재앙은 반복될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화학에 대해 무작정 공포와 혐오로 점철해야 할까요. 화학 혐오도, 공포도 일정 부분 소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있습니다. 소비자가 과학적 사고로 실체를 들여다볼 능력을 키워야 하지만 한계가 있고 그 부담을 온전히 져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공포와 불안은 알아야 할 것이 알려지지 않은 침묵을 통해 나옵니다. 레이첼 카슨도 경계를 넘어버린 오만한 기업과 정부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작품으로 더 많은 시민에게 알렸지요. 과학과 관련된 모든 이해관계자가 침묵을 깨고 사실을 알려야 하고 윤리와 도덕, 환경의 정의를 고려하며 공정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하고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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